국가라는 우상과 민주주의의 진실: '앙상한' 껍데기를 벗겨내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국가의 강력함은 종종 국민을 옥죄는 데 쓰이며, 국가의 부유함은 국민을 착취하는 과정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고 경고했습니다. 국가라는 거대 기구가 비대해질수록 개별 주체의 자유는 오히려 왜소해질 수 있다는 이 역설은 우리가 추구하는 민주주의의 지향점을 다시 묻게 합니다. 민주주의의 성장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원칙을 일상의 삶 속에서 확립해가는 여정입니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선포하는 '국민의(Of the people)' 단계를 넘어, 투표날 하루만 갑(甲)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갑(甲)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민에 의한(By the people)' 즉 시민 참여로 나아가야 합니다. 선거와 다수결이라는 형식적 틀에만 갇힌 '앙상한 민주주의'를 넘어, 시민성과 참여가 살아 숨 쉬는 '풍성한 민주주의'로 이행할 때 비로소 우리 사회는 진정한 복지 국가의 문턱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즉 주권재민이 없는 시민참여는 불가능하며, 시민참여 없이는 결코 복지국가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시민참여는 복지국가로 가는 기본적 토대입니다.
'국민'이라는 숙명과 '시민'이라는 선택: 존재론적 전환
민주주의 사회의 구성원을 '시민'이라 부르지만, '국민'과 '시민'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국민이란 내가 선택하지 않은 즉 태어나는 순간 부여되는 수동적 정체성이라면, 시민은 자신이 내린 '선택'을 통해 스스로를 구성해 나가는 능동적 존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성인이 된 이후의 삶은 직업, 관계, 거주지 등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입니다. 지금의 나의 모습은 내가 선택한 것들의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 내가 내리는 선택의 연속이 내 자신을 구성해가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선택을 내리느냐에 따라 나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민성'이란 자신이 내린 선택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는 태도이며, 신이나 국가, 부모가 아닌 자신의 삶의 의미를 스스로 정하는 태도입니다. 무엇으로부터 인정받을지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것, 그것이 바로 시민의 본질입니다.
선택의 무게와 자유의 공포: 인문학적 홀로섦의 과제
거리의 철학자 미국의 에릭 호퍼가 통찰했듯, 인간에게 가장 힘든 일은 '선택의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자유는 달콤한 보상이 아니라 매 순간 사색하고 선택하며, 그 결과와 미래에 대해 고독하게 책임져야 하는 무거운 짐이기 때문입니다. 시키는 대로만 살아온 노예적 삶은 고달프지만 안전합니다. 그래서 자유의 공포를 견디지 못해 다시 누군가 정해준 틀 속으로 회귀하려는 본성은 소통의 불통과 자기중심적 사고를 낳습니다. <사랑의 기술>의 저자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 도피>에서 이러한 자유에 대한 공포가 '나치즘'을 탄생시킨 배경이라는 분석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선택에 대한 힘듦, 피곤, 공포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인문학의 목적일 것입니다. 반면, 우리 사회의 수많은 편견과 차별은 대개 개인이 '선택하지 않은 것(부모, 고향, 외모, 성별 등)'에서 발생합니다. 미국의 인권운동 리더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유명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에서 우리 아이들이 피부색(선택하지 않는 것)을 기준으로 평가받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평가받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을 외쳤습니다. 선택하지 않은 것을 책임지라고 강요하거나 그것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는 성숙하지 못한 사회입니다. 성숙한 시민사회는 개인이 선택하지 않은 배경이 아닌, 스스로 선택하여 쌓아 올린 인격과 역량을 존중하는 사회입니다.
존재의 불확실성을 껴안는 연대: 왜 ‘약자의 행복’이 기준인가
진정한 복지사회란 개인이 가장 취약해진 순간에도 이웃의 시선이나 제도적 미비 때문에 다른 곳으로 '추방'되듯 이사 가지 않아도 되는 공동체입니다. 삶의 우여곡절 끝에 예기치 않게 약자의 처지에 놓인 시민이라도, 자신이 나고 자란 마을을 떠나지 않고 인간다운 품위를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정주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사회적 약자를 '불쌍한 사람'으로 보며 돕는 '시혜'는 수직적 관계를 전제로 한 후진적 태도입니다. 선진 시민이 약자와 소수자를 지원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나 또한 언제든 약자가 될 수 있다'는 존재의 불확실성을 겸허히 수용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는 행위는 미래의 나를 포함한 공동체 전체를 위한 합리적인 '제도적 대비'입니다. 강자의 행복은 타인의 소외가 존재할 수 있지만, 약자가 행복한 사회는 이미 모든 시민의 행복을 담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도덕적 당위가 아니라 시스템의 완결성을 입증하는 객관적 기준입니다. 결국 좋은 사회는 자본의 풍요가 아니라, '누구나 약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철학적으로 이해하고 존중과 협력을 실천하는 '시민적 사유'의 깊이로 결정됩니다.

자본의 논리를 이겨낸 시민의 선택: 보스턴 더들리 거리의 기적
이러한 '정주권'의 가치를 현실에서 증명한 위대한 사례가 있습니다. 1980년대 미국 보스턴의 더들리(Dudley) 지역은 방화와 쓰레기 투기로 '죽음의 도시'라 불렸습니다. 자본의 논리대로라면 가난한 주민들은 쫓겨나고 외지 자본이 들어와 개발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민들은 떠나는 대신 '더들리 거리 이웃 협의회(DSNI)'를 조직했습니다. 이들은 "우리에게 쓰레기를 버리지 마라"는 캠페인을 넘어, 시 정부를 설득해 비영리 단체 최초로 '토지 수용권'을 확보하는 기적을 일궈냈습니다. 주민들은 방치된 땅을 직접 매입해 '공동체 토지 신탁(CLT)'을 만들었습니다. 땅은 공동체가 소유하고 건물만 개인이 소유하게 함으로써, 투기를 막고 저렴한 주거비를 유지한 것입니다. 이는 자본이라는 '선택하지 않은 환경'에 밀려날 뻔한 주민들이, 스스로 뭉쳐(선택) '이사 가지 않아도 되는 마을'을 직접 설계하고 책임진 주민주권의 승리였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hTYvPOVk68
더들리 스트리트 지역의 주택 문제와 커뮤니티 해결책
이 영상은 보스턴의 더들리 스트리트 지역에서 토지 신탁(land trust) 모델을 통해 저소득층 주민들의 주택 소유권을 보호하고 커뮤니티를 발전시킨 사례를 다룹니다. 특히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매사추세츠에서 12,000개 이상의 부동산이 압류되었음에도 더들리 스트리트 토지 신탁의 주택들은 압류되지 않았던 성공 사례와 커뮤니티 조직화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주요 내용
- 더들리 스트리트 지역의 과거와 변화: 25년 전 더들리 스트리트 지역은 부재지주들에 의해 수백 채의 주택이 영리 목적으로 방화되었고, 1,300개의 빈 부지가 보스턴의 쓰레기 투기장이 되었습니다. 이후 커뮤니티가 조직화되어 더들리 스트리트 근린 이니셔티브(DSNI)를 창설했고, 시 당국에 도전하여 저소득층 주민들을 위한 영구적으로 저렴한 주택을 건설할 수 있는 토지 신탁이라는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00:24-01:23)
- 주택의 의미와 커뮤니티 가치: 더들리 지역 주민들은 집을 단순한 상품이 아닌 인권의 일부로 보며, 안전한 쉼터와 건강한 이웃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장소로 여깁니다. (00:03-01:37)
- 청년 리더십의 성장: 조직 내에서 젊은 세대가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되었고, 어릴 때부터 커뮤니티에 헌신한 청소년들이 성장하여 현재는 조직을 이끌고 있습니다. 존 배로우스와 제이슨 웹 같은 청소년들의 참여 사례가 소개되었습니다. (01:37-02:40)
- 토지 신탁의 성과: 500개 이상의 빈 부지가 주택, 정원, 공원, 학교, 심지어 타운 커먼으로 변모했습니다. 200개 이상의 주택이 토지 신탁 위에 건설되어 이미 입주가 완료되었으며, 최근에는 DSNI 추첨을 통해 자격을 갖춘 구매자들에게 추가 주택이 제공되었습니다. (02:40-03:44)
- 미래를 향한 도전: DSNI는 압류된 주택을 인수하여 재건하고 재판매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으나, 신용 시장이 개방되어야 더들리에서 더 많은 주택 소유자와 저렴한 주택을 확보하는 꿈을 계속 추진할 수 있습니다. 커뮤니티는 한편으로는 근린 압류와 다른 한편으로는 다음 세대의 희망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06:36-07:02)
인사이트
- 토지 신탁 모델은 저소득층 주민들에게 주택 소유권을 제공하면서도 금융 위기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임이 입증되었습니다.
- 커뮤니티 조직화와 주민 참여는 지역 문제 해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 청소년의 참여와 리더십 개발은 커뮤니티의 지속 가능한 발전에 중요한 요소입니다.
- 주택을 단순한 상품이 아닌 인권으로 보는 관점은 주택 정책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관련 키워드: 커뮤니티 조직화, 토지 신탁, 저렴한 주택, 주택 압류, 청년 리더십, 도시 재생
주민자치회, 주민(住民)에서 주권자(主民)로 나아가는 길
대한민국 현대사는 선택하지 않은 것에 의해 억압받던 시대를 지나, 시민 개개인이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도록 하는 문화를 구축해온 과정입니다. 투표날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주권자로서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민주주의 완성점에 주민자치회가 있습니다. 주민자치회는 읍면동 단위에서 주어진 권한과 예산에 대해 주민이 스스로 선택하고, 계획하고, 책임지는 장입니다. 직접 선택하고 책임을 져본 경험은 단순히 거주하는 '주민(住民)'을 마을의 진짜 주인인 '주권자(主民)'로 변화시킵니다. 실행의 고충을 겪어본 주민은 공무원의 어려움을 깊이 이해하게 되며, 비난보다는 대안을 제시하는 성숙한 협력자로 거듭납니다. 홀로 선 시민들이 연대하여 스스로의 미래를 선택하고 책임지는 현장, 그곳에서 우리는 비로소 선진 복지사회의 꿈을 현실로 만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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