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원이라는 익숙한 이름의 관성
주민자치회 회의 현장에서 위원들을 만나다 보면 가장 자주 듣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 동네에 주차장이 부족하니 의제로 올려야겠어요.", "공원 벤치가 낡았으니 교체해달라고 해야죠.", "도로 포장도 오래됐는데, 이번에 한번 요구해봅시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주민의 불편을 해소하고 싶은 마음, 그 자체는 자치의 씨앗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를 물어야 합니다. "이것은 민원인가, 의제인가?" 수십 년간 우리는 행정이라는 체계 앞에서 '민원인'으로 살아왔습니다. 권한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창구에 줄을 서고, 담당자를 찾아가고, 요구하고, 기다리는 것이 주민으로서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그 경험이 몸에 깊이 새겨진 탓에, 주민자치회로 전환이 되었지만 의제 토론 내용은 지난 '민원인'의 시절과 다르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주민자치회가 다뤄야할 '의제'의 특징을 선명하게 구분하고, 의제별 특징을 이해해보려고 합니다.
권한은 생겼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주민자치회 출범과 함께 우리에게는 전에 없던 권한이 생겼습니다. 이전에는 읍면동장님에게만 있었던 '마을계획을 스스로 수립하고, 선정하고, 실행하는 권한'입니다. 행정의 보조자에서 마을의 주인으로, 역할 자체가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권한은 생겼지만, 그 권한을 쓰는 방식은 여전히 예전 그대로인 경우가 많습니다. 회의 테이블에 앉아서도 "행정에 요구할 것"을 먼저 찾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의제를 고르는 기준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행정이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주민자치회는 결국 또 하나의 민원 창구가 됩니다. 형식만 세련됐을 뿐, 본질은 달라지지 않게 됩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바로 '의제의 가르마'를 타는 지혜입니다. 모든 요구를 하나의 주머니에 뒤섞어 담아두면, 무엇이 주민 스스로 해결할 일인지, 무엇이 행정의 몫인지, 무엇이 함께 협력할 일인지 구분이 흐려집니다. 가르마를 탄다는 것 즉 마을의제를 구분한다는 것은 배제가 아닙니다. 제자리를 찾아주는 일입니다. 행정이 해야 할 일은 행정에게, 주민이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손으로, 함께 풀어야 할 일은 협치의 테이블로. 이 구분이 분명해질 때, 주민자치회는 비로소 '요구하는 입술'이 아닌 '움직이고 협력하는 손과 발'이 됩니다.
임파워먼트, 자치는 신뢰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꿈꾸는 주민자치는 임파워먼트(Empowerment)의 과정입니다. 임파워먼트란 권한을 나눠주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를 신뢰하고, 각자가 가진 잠재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북돋우는 것입니다. 이웃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고, 골목 어귀의 작은 가능성을 키워내고, 혼자서는 엄두도 못 냈던 일을 함께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쌓일 때, 마을은 달라집니다. 주차장 하나를 요구하는 마을과, 주차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법을 찾아가는 마을은 겉으로는 비슷해 보여도 협력의 차원이 다릅니다. 전자는 행정이 움직여야 변하지만, 후자는 주민이 먼저 움직입니다.
손발에 흙을 묻히는 사람이 주인이다
의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는 행정이 주도적으로 실행해야 하는 '민원성 의제(일반제안형)', 둘째는 주민과 행정이 함께 계획하고 실행하는 '자치계획형(참여의제)'입니다. (임의의 언어로 구분해보았습니다. 시군구별로 구분명칭이 다를수 있습니다) 민원성 의제는 도로 건설, 공공시설 확충, 대규모 주차장 조성처럼 전문성과 예산, 사후관리가 필요한 사업들입니다. 이는 행정이 전문 업체에 위탁해 처리해야 할 영역입니다. 주민자치회 위원들이 포크레인을 끌고 나가거나 보도블록을 깔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자치계획형(참여의제)입니다. 마을 활성화를 위해 주민자치회가 직접 계획하고 실행까지 책임지는 사업입니다. 예를들면 마을 신문을 만들고, 복지 사각지대를 발굴하고, 소외된 이웃을 위한 프로그램을 직접 운영하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주민들이 직접 실행 가능한 의제에 뛰어들 때, 비로소 자치의 효능감이 생깁니다. 시설물을 지어달라고 외치는 것보다, 지어진 시설물 안에서 어떤 온기를 만들어낼지를 고민하는 것. 그것이 주민자치회의 본질적 역할과 협력 지점입니다.

협력(協力)과 협치(協治), 한 글자의 무게
흔히 혼용되는 '민관협력'과 '민관협치'는 그 깊이와 책임의 무게가 다릅니다. 민관협력(民官協力, Public-Private Cooperation)에서 '협력(協力)'은 '힘을 합친다'는 뜻입니다. 행정과 민간이 공동의 목적을 위해 자원과 정보를 공유하며 돕는 형태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위원회, 주민참여예산제입니다. 위원회는 주민이 의견을 제안하는 공식적 자문정책이고, 주민참여예산제는 주민이 의제를 제안하고, 민관이 함께 참여하여 행정의견과 주민투표로 사업을 선정하지만, 선정된 의제들의 실제 집행과 예산 책임의 주체는 행정입니다. 주민은 사후 모니터링을 통해 의견을 제시하는 수준입니다. 행정이 실행을 주도하면 주민이 조력자로 참여하는 구조입니다.반면 주민자치회는 읍면동 단위 민관협치(民官協治, Public-Private Governance)입니다. '협치(協治)'는 '함께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공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행정과 민간이 대등한 파트너십을 맺고, 의사결정은 물론 실행과 평가, 결과에 대한 책임까지 공유하는 수평적 시스템입니다. 주민이 직접 실행의 주체가 되어 결과 보고서를 내고 감사까지 받는 능동적인 과정입니다. 협력이 '돕는 것'이라면, 협치는 '함께 경영하는 것'입니다.
현장의 질문 하나가 의제를 바꾼다
주민자치회 활동현장에서 있을 법한 시나리오를 상상해보겠습니다. 어느 지역 주민자치회 분과 회의 시간이었습니다. 한 위원이 비장한 표정으로 제안서를 내밀었습니다. "우리 동네 보도블록이 다 깨져서 노인들이 다니기 위험합니다. 이번 주민총회 의제로 보도블록 전면 교체를 올립시다." 주변 위원들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때 다른 주민자치회 위원이 조용히 물었습니다. "위원님, 보도블록을 교체하면 우리 위원들이 직접 공사를 하실 건가요? 아니면 매일 나가서 감독하실 건가요?" 위원은 당황하며 답했습니다. "그건 구청에서 업체 불러서 해야지, 우리가 어떻게 합니까?" 다른 위원은 "맞습니다. 그건 행정이 해야 할 민원의제입니다. 우리가 총회에서 결정할 것은 '우리가 직접 무엇을 할 것인가'입니다. 보도블록 교체는 행정에 강력히 건의하고 주민참여예산제에 제안해서 예산을 끌어오도록 우리가 조직화합시다. 대신 우리 자치회에서는 그 보도블록 위를 걷는 노인들을 위해 안전 지도를 만들고, 야간 자율 방범 활동을 하는 참여의제를 고민해보면 어떨까요?" 이 대화 속에 의제 구분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민원의제는 행정에 요청하되, 우리는 그 예산을 마을로 끌어오는 조직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자치 예산으로는 주민들이 직접 몸으로 부딪쳐 마을의 변화를 만드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의제를 바꾸자, 마을이 달라진다 : 국내외 사례
서울시 성북구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성북구는 2020년 주민참여예산 제안사업을 정리하며 '일반제안형'과 '참여의제형'을 선명히 구분했습니다. 노후 가로등 교체나 하수관로 정비 같은 민원은 행정의 몫으로 넘겼고, 주민자치회는 '골목길 정원사 양성', '마을 소식지 발간', '업사이클링 공유 마켓' 같은 참여형 사업에 집중했습니다. 그래서 점점 주민들은 단순한 요구자가 아니라, 마을 문제를 직접 해결하는 전문가로 성장했습니다.
일본 세타가야구의 사례도 주목할 만합니다. 이곳 주민들은 행정에 마을에 공원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하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직접 공원 관리 주체가 되는 '공원 관리 협정'을 맺고, 원하는 시설을 직접 배치하며 청소와 관리를 전담했습니다.(출처: 일본 자치체 국제화협회(CLAIR) 보고서) 민원(공원 건설)을 참여(공원 운영 및 관리)로 전환한 사례입니다. 시설이라는 하드웨어는 행정이 뒷받침하되, 그 안을 채우는 소프트웨어는 주민이 주도하는 민관협치의 좋은 사례입니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1/04/29/2001042970237.html
[살기좋은 도시] ⑧ 주민이 만든 도쿄 세타가야區
살기좋은 도시 ⑧ 주민이 만든 도쿄 세타가야區
www.chosun.com
https://www.incheon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638
[기획] 일본의 다양한 마을만들기 지원 방법 - 인천투데이
사회 양극화와 주민 간 갈등, 각종 지역 문제로 인해 지역공동체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특히 함께하는 삶의 시작점인 ‘마을’을 나와 우리를 풍요롭게 하는 공간으
www.incheontoday.com
독일 프라이부르크의 놀이터 사례는 더욱 구체적입니다. 150여 개 놀이터 중 상당수는 아이들과 부모들의 참여 속에 자연 친화적으로 조성되었습니다. 완공 이후 행정은 시설 안전 점검 같은 하드웨어 관리를 맡고, 일상적인 운영은 주민에게 위임했습니다. 주민들은 장난감 보관함과 파라솔의 열쇠를 직접 관리하며, 아이들이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도록 돕습니다.(출처: 오마이뉴스 '아이가 더러워지는 진짜 놀이터' 리포트) 놀이터를 이용하는 단계를 넘어, 주민이 공공 공간의 책임자로서 권한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반면, 이런 협치 체계 없이 행정이 일방적으로 조성한 놀이터들은 종종 시행착오를 겪게 됩니다. 주민의 라이프스타일을 고려하지 않은 고가의 놀이기구가 방치되거나, 관리 주체가 모호해져 우범 지대로 전락하는 사례가 유럽 곳곳에서도 보고됩니다. 지속 가능한 공간을 만드는 힘은 '얼마나 비싼 시설을 들이느냐'가 아니라, '누가 그 공간을 책임지고 운영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88334
아이가 더러워지는, 여기가 '진짜 놀이터'
지난 2일 환경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모래놀이터 100개소 중 14개소에서 기생충(란)이 검출돼 어린이 활동공간의 환경오염상태가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실외놀이터 700개소
www.ohmynews.com
주민참여예산과 주민자치, 같은 듯 다른 두 길
주민참여예산제와 주민자치 사업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주민참여예산은 민관협력의 구조입니다. 주민이 제안하고 선정하지만, 실행은 행정이 합니다. 사후 모니터링을 통해 개선 의견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반면 주민자치회는 민관협치입니다. 협력와 협치는 결이 다릅니다. 협치는 주민이 직접 실행의 주체가 되어 책임까지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위원들이 민원 의제에 집중하면 행정과의 소모적 갈등이 잦아지게 됩니다. "왜 우리가 요구한 주차장을 안 지어주느냐"는 불만만 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의제의 가르마를 잘 타서 "주차장 건설은 행정이 책임지고 추진해달라. 대신 주차장 운영 규칙을 만들고 이웃 간 주차 갈등을 해결하는 주민 소통방은 우리가 운영하겠다"고 제안할 때, 행정은 주민자치회와의 협치가 시작되고, 밀도있는 변화가 이뤄집니다.
마을의 무대를 만드는 위원님들과 마을리더들께
민원인이라는 익숙하고 안온한 수혜자의 자리는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요구하고 기다리면 행정이 채워줄 것이라 믿는 수동적 태도는 당장의 편안함을 줄지 모르나, 그곳에 마을의 진화나 주민의 성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반면, 마을의 안녕과 행복을 스스로 짊어지는 주권자의 자리는 낯설고 때로는 감당하기 버거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경한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는 지점에서 마을의 생명력은 살아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의제의 명확한 계통을 세우고 실행의 좌표를 설정한 것은 단순히 사무적인 절차를 이행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의존의 관성을 끊어내고 '공공의 책임'을 기꺼이 나누어 갖겠다는 실천적 선언이며, 우리 마을의 미래 지형도를 새롭게 그려내는 주체적 설계의 시작입니다.
전국의 주민자치회 위원님들, 마을의 미래를 설계하는 읍면동 주민 리더와 마을활동가, 그리고 이들의 파트너가 되어주시는 공무원 여러분은 주민들에게서 쏟아지는 파편화된 민원들을 분류하여, 마을의 미래를 담은 자치 의제로 빚어내는 현장의 연금술사입니다. 주민들이 눈에 보이는 시설물에 대한 욕구를 표현할 때, 그 이면에 숨겨진 '이웃과의 소통에 대한 갈증'과 '내 손으로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는 활동의 욕구'를 읽어내 주십시오. 읍면동 공무원 여러분은 예산을 집행하고 업체를 선정하는 관리자에서 벗어나, 주민들이 제안한 아이디어가 마을의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지도록 돕는 촉진자이자 조력자가 되어주십시오. 주민들이 스스로의 힘을 믿고, 자신의 손으로 마을의 시간을 빚어갈 수 있도록 곁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장기적으로 다양성의 요구가 높아질 선진 대한민국에서 공무원들의 피로도는 낮아지게 될 것입니다. 주민들의 자치계획 작성과 운영역량이 높아질수록 행정은 더 수월한 역할과 지속가능한 업무를 할 수 있게 됩니다. 마을현장에서 동료들과 치열하게 부딪히며 쌓아온 연대의 시간과 그 과정에서 맺힌 땀방울은 풍요로운 민주주의를 마을에 안착시키게 할 것입니다. 로마의 철학자인 세네카는 "운명은 기꺼이 따르는 자는 인도하고, 거부하는 자는 끌고 간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시대의 흐름에 등 떠밀려 가는 방관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물길을 내는 창조자가 될 것인가 이제 그 물음에 대한 답을 현장의 실천으로 증명하며, 우리가 정성껏 마련한 협치의 무대 위로 꾸준히 나아갈 시간입니다.
'연구소칼럼[콩나물시루]'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생존의 행정에서 행복의 주민조직으로: 어느 지역의 마을복지사업 컨설팅 현장, 주민들과 함께 하는 마을복지사업 기획운영 사례 (2) | 2026.05.07 |
|---|---|
| [주민자치칼럼] 행정의 보조자를 넘어 지역의 결정권자로: 주민자치회라는 새로운 엔진 (0) | 2026.04.30 |
| [주민자치칼럼] 권한은 '좋은 것'이 아니라, 다뤄야 할 '에너지'입니다. (0) | 2026.04.22 |
| [주민자치칼럼] 13년의 ‘시범’은 끝났다: 주민이 '결재하는' 주민총회 (0) | 2026.04.13 |
| 비영리 리더의 해방일지: 무거운 ‘당위’를 비우고 홀가분한 ‘욕구’을 채우다 (2) | 2026.04.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