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전국의 주민자치회 위원 여러분. 지난번 칼럼에 이어서 가슴 벅찬 소식부터 나누고 싶습니다. 2026년 3월 30일, 기나긴 시범사업의 터널을 지나 「지방자치법」 개정안이 마침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이제 읍면동에 ‘주민자치회를 둘 수 있다’는 엄연한 법적 근거가 마련된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13년의 기다림 끝에 당당한 법적 기구로 우뚝 선 위원님들께 축하와 응원을 보내며, 우리 시대 주민자치의 의미를 톺아보는 칼럼을 시작합니다.
선진사회와 민관협치의 피할 수 없는 만남
잠시 질문을 던져봅니다. 후진사회와 선진사회 중 홀로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낮은 사회는 어디일까요? 정답은 ‘선진사회’입니다. 사회가 고도로 복잡해지고 다양성이 증가할수록 우리는 서로 촘촘하게 의존하지 않으면 단 하루도 살아가기 힘듭니다. 과거에는 행정은 행정대로, 민간은 민간대로 각자 자기 길을 가도 사회가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선진국 반열에 오른 지금의 대한민국은 다릅니다. 골목길 쓰레기 문제부터 어르신 돌봄까지, 행정의 힘만으로는, 주민의 단결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복합적인 난제들이 가득합니다. 민과 관이 머리를 맞대는 ‘민관협치’는 이제 선택이 아니라, 지역사회를 움직이게 하는 유일한 열쇠입니다.
‘살고 있는’ 주민에서 ‘참여하는’ 주인으로
우리가 흔히 쓰는 ‘주민(住民)’이라는 단어에는 단순히 그 지역에 살고 있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주민자치의 맥락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주민은 ‘주인 주(主)’자를 쓰는 ‘주민(主民)’입니다. 이 뜻은 '살고있는'과는 상대적으로 '참여하는'의 의미를 담았습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신경준은 “길에는 본래 주인이 없어서 그 위를 걸어가는 자가 주인이다”라고 했습니다. 마을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 지역의 현안에 관심을 갖고 직접 발걸음을 내딛는 사람이 진짜 주인입니다. ‘자치(自治)’ 역시 스스로 허락하고(自許), 스스로 결재하며(自決), 스스로 책임지는(自責) 과정을 의미합니다. 주어진 예산 범위 내에서 우리 마을에 필요한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것, 그것이 주민자치의 본질입니다.
불편함을 견디는 힘, ‘공적 역량’이라는 무게
우리는 누구나 사적인 공간에서 가장 편안합니다. 내 마음대로 하고 익숙한 것을 선택하는 ‘사적인 영역’은 중력처럼 우리를 저절로 끌어당깁니다. 하지만 주민자치회 위원이라는 자리는 다릅니다. 읍면동에서 공무원 다음으로 큰 권한을 가진 마을의 공적 대표자이기 때문입니다. 공적인 역할은 본래 불편하고 배워야 하며, 늘 긴장되는 영역입니다. 이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면 자꾸만 사적인 편의로 기울게 되고, 그 선을 넘는 순간 갈등과 책임이라는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그래서 위원님들께 교육은 ‘필수’입니다. 공적 활동은 저절로 되지 않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기에, 정기적인 학습을 통해 ‘공적 근육’을 키워야만 이 무게를 견딜 수 있습니다.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예산 집행권, 그 혁명적 의미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고조선 이래 한반도 역사에서 평범한 주민이 공적인 예산을 스스로 선택하고, 실행하고, 책임지는 정책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투표날 정치인을 뽑는 권한은 있었으나, 예산의 쓰임새를 직접 결정하고 집행할 권한은 부재했습니다. 주민자치회는 우리 역사상 최초로 주민에게 공적 예산의 선택권과 집행권을 부여한 혁명적인 제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역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직접 쓰고 계신 것입니다. 단순한 봉사자가 아니라 마을의 공적 자원을 배분하고 관리하는 ‘정책 결정자’로서의 자부심을 가지셔도 좋습니다.

위촉자가 증명하는 ‘수평적 분권’의 가치
주민자치위원회와 주민자치회는 이름 한 글자 차이지만 그 위상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결정적인 차이는 ‘누가 위촉하느냐’에 있습니다. 과거 위원회는 임명직 공무원인 읍·면·동장이 위촉하는 행정 자문기구였습니다. 반면 주민자치회는 선출직인 시·군·구청장이 직접 위촉합니다. 시장, 군수, 구청장은 주민의 투표로 뽑힌 사람들입니다. 선출직 단체장이 주민의 대표인 위원님들을 위촉한다는 것은, 행정과 주민이 상하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관계’로 마주함을 상징합니다. 진정한 수평적 분권이 주민자치회라는 이름표 안에 담겨 있습니다.

주민총회, 마을 사업을 확정하는 ‘최종 결재’의 드라마
많은 위원님이 주민총회를 준비하며 “왜 이렇게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하나”라고 묻곤 하십니다. 총회를 여는 이유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멋지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교육이 주로 되니, 반복될수록 힘이 듭니다. 이유를 알아야 자발성이 촉진됩니다. 주민총회를 하는 이유는 자치회가 세운 자치계획에 대해 마을의 주인인 주민들에게 ‘최종 결재’를 받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일반 행정 사업이 읍면동장의 결재로 실행된다면, 자치 사업은 주민의 결재가 있어야 실행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천 명(수만명)의 주민을 일일이 찾아갈 수 없기에 감당할 수 있는 총회참석 인원의 %를 적용하여 주민총회라는 역동적인 공론장을 여는 것입니다. 투표를 통해 주민의 지지를 많이 얻을수록 그 사업은 강력한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게 됩니다. 이 치열한 과정을 거칠 때 행정의 일방통행식 사업에서 발생하는 불만과 ‘뒷담화’는 줄어들고, 마을의 신뢰는 두터워집니다.
아른스테인의 사다리, 우리가 도달한 협치의 정점
주민 참여의 발전 과정은 아른스테인의 ‘참여의 사다리’ 모델로 설명됩니다. 과거에는 행정이 주민을 계도하거나 일방적으로 정보를 제공하는 데 그쳤습니다. 그러다 위원회를 통해 의견을 제안받고, 참여예산제로 제안 및 선정하고, 일부 사업에 참여하는 단계를 거쳤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다리의 꼭대기, ‘민관협치’인 주민자치회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사업의 제안과 선정은 물론 실행과 평가까지 주민이 주도합니다. 사다리를 높이 올라갈수록 주민의 역량과 권한은 커지고, 행정은 더 깊게 소통하며 신뢰를 쌓아갑니다. 주민자치회는 이 사다리의 가장 높은 곳에서 마을을 이끌어가는 조직입니다.


마을을 가꾸는 네 가지 손길: 위원의 핵심 역할
마을의 대표로서 위원님들이 수행하는 핵심 역할은 단순한 의무를 넘어 공동체를 지탱하는 기둥과 같습니다. 이 역할들은 주민의 잠재력을 깨우고, 이웃을 돌보며, 내일을 설계하고, 중심을 바로잡는 네 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북돋우기입니다. 이는 주민 스스로 마을의 주인임을 깨닫고 잠재력을 발휘하도록 돕는 임파워먼트 과정입니다. 상대방을 신뢰하고 그가 가진 역량을 최대로 발휘하게 하는 것이 핵심이며, 주민들이 "우리 동네 문제는 우리가 해결할 수 있다"는 효능감을 갖도록 교육과 소통의 장을 지속적으로 마련하는 활동을 포함합니다. 예를 들면, 주민자치회 위원만이 마을 계획을 수립하기보다 ‘의제 발굴 워크숍’을 열어 평범한 주민들이 직접 문제를 발견하고 아이디어를 제안하게 한 사례가 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마을주민들은 주민자치회의 대표성을 고취하고, 자신들의 의견이 실제 자치계획에 반영되는 것을 보며 주민자치 효능감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는 돕기입니다. 행정의 손길이 미처 닿지 않는 곳을 살피며 공동체의 안전망을 구축하는 역할입니다. 사적인 편의보다 공공성을 우선하여, 목소리 작은 소수자의 의견이 마을 정책에 반영되도록 세심하게 배려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서울시 성동구 마장동 주민자치회는 고독사 위험이 큰 1인 가구 어르신들을 위해 주민들이 직접 밑반찬을 배달하며 안부를 묻는 '마장동 안심 요구르트' 사업을 실행했습니다. 이는 주민세 환원금을 활용해 주민이 직접 이웃을 돌보는 실질적인 공동체 모델을 구축한 성과입니다.
셋째는 만들기입니다. 마을에 필요한 공익적 사업을 발굴하고, 이를 지속 가능하게 할 체계를 만드는 창조적 역할입니다. 이는 단순히 "이런 사업이 필요합니다"라는 제안권을 넘어, 주민총회를 통해 우선순위를 정하는 결정권을 행사하는 실질적인 마을 기획 과정입니다 . 예를 들면, 횡성군에서 추진한 '전천변 음악이 울려 퍼지는 산책로 조성' 사업이 있습니다. 산책로에 방송 시스템을 설치해 평상시에는 음악을, 재난 시에는 안전 방송을 송출하도록 기획하여 주민 투표로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생활 밀착형 인프라를 직접 구축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바루기입니다. 행정이 예산을 올바르게 집행하는지 살피는 파수꾼이자, 사업 결과를 주민에게 투명하게 보고하여 피드백의 선순환을 만드는 역할입니다. 갈등 발생 시 이를 조정하고 투명한 정보 공개와 평가를 통해 공동체의 신뢰를 회복하는 작업입니다. 예를 들면, 서울시 은평구 주민자치회가 주민 제안으로 추진된 공원 조성 사업의 이행 과정을 모니터링하여 설계 당시 노인 주민들의 이용 편의가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음을 발견하고 행정에 설계 변경을 강력히 요구하여 관철시킨 사례가 있습니다. 이는 사업 집행 단계에서 주민의 뜻이 왜곡되지 않도록 바로잡은 대표적인 활동입니다.
제도적 완성을 향한 멈추지 않는 여정
지방자치법 개정으로 법적 지위는 확보했으나 과제도 남았습니다. 설치 근거가 “둔다”가 아닌 “둘 수 있다”는 임의 규정으로 되어 있어, 각 지자체의 적극적인 의지와 위원님들의 역량이 제도의 성패를 가르게 되었습니다. 또한 기존 직능단체와의 갈등을 예방하고 통합적인 마을 거버넌스를 구축하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위원 여러분. 길에는 본래 주인이 없어서, 그 위를 걸어가는 자가 주인이라고 했습니다. 귀찮고 고단한 그 공적인 걸음을 묵묵히 내디딜 때 비로소 위원님들은 마을의 진정한 주인이 됩니다. 시민교육콘텐츠연구소는 여러분의 그 용기 있는 발걸음을 늘 응원하겠습니다. 이번 한 주도 마을의 주인으로서 당당하고 즐거운 자치를 일궈가시길 바랍니다.

'연구소칼럼[콩나물시루]'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주민자치칼럼] 주민자치 의제별 특징이해 : ‘해달라’는 요구에서 ‘하겠다’는 책임으로 (0) | 2026.04.27 |
|---|---|
| [주민자치칼럼] 권한은 '좋은 것'이 아니라, 다뤄야 할 '에너지'입니다. (0) | 2026.04.22 |
| 비영리 리더의 해방일지: 무거운 ‘당위’를 비우고 홀가분한 ‘욕구’을 채우다 (2) | 2026.04.11 |
| 120% 활용가능한 의제에 대한 주인의식을 끌어올리는 방법 : 피라미드 토의 (0) | 2026.04.05 |
| [주민자치칼럼] 13년의 꼬리표를 떼다: 지방자치법 개정안 통과와 책임성 있는 주민자치의 길 (0) | 2026.04.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