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영리 공익활동 현장은 언제나 치열하다. 자원봉사센터, 복지관, NGO, NPO, 중간지원조직 할 것 없이, 우리가 마주한 사회적 과제는 복잡해졌고 시민들의 눈높이는 높아졌다. 예산은 한정적이고 인력은 늘 부족한 이 만성적인 결핍 속에서, 조직을 이끄는 리더의 역량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오래된 리더십 유머 중에 리더를 네 부류로 나누는 '똑부, 똑게, 멍부, 멍게'라는 말이 있다. 똑똑하고 부지런한 사람(똑부), 똑똑하고 게으른 사람(똑게), 멍청하고 부지런한 사람(멍부), 멍청하고 게으른 사람(멍게)이 그것이다. 이 분류법은 시간이 꽤 지난 것임에도 불구하고, 선진 대한민국 비영리 생태계에서 아직도 뼈아픈 통찰을 준다. 우리 현장에서 최악의 리더는 누구일까? 놀랍게도 '멍게(멍청하고 게으른)'가 아니다. 조직을 가장 힘들게 하는 건 '멍부(멍청한데 부지런한)' 유형이다. 방향성 없이 의욕만 앞서서, 실익 없는 공모사업이란 공모사업은 다 찔러보고, 불필요한 행사 기획으로 실무자들을 야근의 늪으로 몰아넣는 리더다.
"센터장님, 이번 주말 행사 준비로 팀원들 모두 번아웃 상태입니다."라는 팀장의 호소에, 멍부 유형의 리더는 이렇게 답한다. "좋은 게 좋은 거잖아. 우리가 조금만 더 뛰면 지역사회가 바뀌어. 내가 주말에 나와서 같이 짐 나를게." 그의 부지런함은 헌신처럼 보이지만, 전략 없는 근면함은 실무자들에게 '사고 처리반'의 역할을 강요한다. 리더가 칠 사고를 수습하느라 정작 중요한 미션은 뒷전이 되고, 활동가들은 "제발 가만히만 계셔주면 좋겠다"는 말을 삼키며 소진되어 간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시대, 특히 가치 지향적인 MZ세대 활동가들과 함께하는 비영리 조직에 필요한 리더는 누구인가? 바로 '똑게(똑똑하고 게으른)'다. 여기서 '게으르다'는 것은 방임을 뜻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지만, 동료가 해낼 때까지 기다려주는 인내심'을 의미한다. 이를 '위임의 미학'이라 부르고 싶다.

현장의 장면들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비춰보자. 입사 3년 차 김 간사가 새로운 모금 캠페인을 기획해 팀장에게 가져왔을 때, 네 가지 유형의 리더는 각각 어떻게 반응할까?
[사례 1: 최악의 '멍부(멍청하고 부지런한)' 팀장] "김 간사, 옆 동네 센터에서 이번에 '플로깅 챌린지' 한다더라. 우리도 질 수 없지! 당장 이번 주말에 전 직원 나와서 천변 청소하고 인증샷 찍자고. 현수막이랑 어깨띠 문구는 내가 지금 기막힌 게 떠올랐어. 내가 업체 주문 넣고 직접 찾으러 갈 테니까 김 간사는 지금 당장 보도자료 뿌려!" (김 간사의 생각: '이미 다음 달에 체계적인 환경 캠페인이 잡혀 있는데... 갑자기 웬 보여주기식 행사? 전략도 없이 의욕만 앞서서 일만 벌이네. 주말 출근해서 뒷수습은 또 우리 몫이겠구나.')
[사례 2: 답답한 '멍게(멍청하고 게으른)' 팀장] "김 간사, 이 기획안... 뭐 나쁘진 않은데, 이사회 통과될까? 글쎄, 난 잘 모르겠네. 일단 김 간사가 이사님들한테 한번 슬쩍 여쭤보고 반응 좋으면 진행하고, 아니면 말고. 급한 거 아니니까 천천히 해. 난 좀 피곤해서." (김 간사의 생각: '책임지기 싫어서 간만 보시네. 방향을 정해줘야 실무를 하지. 무관심하고 방관하는 리더 밑에서 일하려니 속이 터진다.')
[사례 3: 아쉬운 '똑부(똑똑하고 부지런한)' 팀장] "김 간사, 기획 의도는 좋은데 예산 산출 근거가 약해. 그리고 홍보 문구는 좀 더 감성적으로 가야 하지 않겠어? 내가 아는 업체가 있으니 거길 쓰고, 문구는 내가 오늘 밤에 수정해서 다시 줄게. 자, 여기 여기도 고쳐야 해." (김 간사의 생각: '배울 점은 많지만 숨이 막힌다. 어차피 팀장님이 다 고칠 거면 내가 왜 고민했지? 시키는 대로만 하자. 내 성장은 멈춘 것 같아.')
[사례 4: 이상적인 '똑게(똑똑하고 게으른)' 팀장] "김 간사, 기획안의 타겟층 설정이 아주 신선하네. 다만 예산 부분이 현실적으로 집행 가능할지 조금 우려되는데, 대안이 있을까? 김 간사가 생각한 방향대로 일단 진행해 보자. 이사회 설득은 내가 맡을 테니, 김 간사는 실행에 집중해 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신호 보내고." (김 간사의 생각: '내 기획이다. 책임감이 느껴지지만, 팀장님이 뒤를 받쳐주니 한번 제대로 해보자. 내가 주도적으로 일하고 있구나.')
결국 똑똑한 리더(똑게)는 실무자가 스스로 답을 찾도록 질문을 던지고, 실행의 공간을 내어준다. 만기친람(萬機親覽), 즉 임금처럼 모든 일을 직접 챙겨야 직성이 풀리는 리더는 사실 '자기 신뢰'가 부족한 사람이다. 내가 하지 않으면 일이 잘못될 것 같다는 불안감, 즉 동료를 믿지 못하는 마음은 결국 자신을 믿지 못하는 마음에서 기인한다. 피터 드러커는 "권한 위임이란 일을 떼어 남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진정 자신의 일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중간관리자인 팀장들의 역할이 그래서 중요하다. 위에서는 성과를 닦달하고 아래서는 성장을 요구하는 '샌드위치' 같은 위치지만, 여러분은 조직의 허리이자 필터다. 멍부형 상사의 불필요한 지시가 실무자에게 그대로 꽂히지 않도록 막아주는 방파제이자, 실무자의 서툰 날갯짓을 기다려주는 둥지가 되어야 한다. "이거 왜 안 했어?"라는 추궁보다 "이 일을 진행하는 데 어떤 장애물이 있어? 내가 뭘 치워주면 될까?"라고 묻는 태도가 필요하다.
사랑하는 동료 활동가 여러분. 우리는 돈보다 '의미'를 좇아 이 척박한 곳에 모인 사람들이다. 누군가는 우리를 '좋은 일 하는 사람'이라며 낭만적으로 보지만, 우리는 안다. 이 일이 얼마나 고도의 전문성과 감정 노동, 그리고 헌신을 요구하는지를. 때로는 리더의 독선에 치이고, 때로는 변하지 않는 사회에 좌절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기억하자.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일에 대해서만 진정한 책임을 진다. 당신이 리더라면(혹은 예비 리더라면), 부하 직원의 손에서 탄생한 결과물이 당신의 예상보다 조금 부족해 보이더라도 그 과정에서 피어난 '주도성'의 가치를 높게 사주길 바란다. 비영리 조직의 성과는 당장의 숫자로 증명되는 매출이 아니다. 우리는 사람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견고한 공동체의 문제를 풀어가는 사람들이다. 거친 포도가 어둠과 침묵의 시간을 견뎌 깊은 향의 와인으로 숙성되듯, 사람을 키우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은 조급함을 버린 중기(中期)적 호흡과 묵묵한 기다림 속에 비로소 완성된다.
가장 좋은 리더는 '나를 필요 없게 만드는 사람'이다. 당신이 자리를 비워도, 당신이 심어준 신뢰와 시스템 덕분에 팀원들이 신나게 일하며 "우리 팀장님은 믿고 맡겨주시니까"라고 말할 수 있다면, 당신은 이 시대 최고의 '똑게' 리더다. 오늘도 세상의 그늘진 곳을 비추느라 정작 자신의 마음은 돌보지 못했을 당신에게 깊은 존경과 응원을 보낸다. 당신의 '현명한 게으름'이 우리 조직을, 그리고 우리 사회를 더 건강하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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