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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콩나물시루]

'광택'보다 '숨결'을: 껍질을 벗고 서로에게 스며드는 조직

강정모 소장 2025. 12. 1. 14:35

유난히 추운 올겨울, 비영리 조직의 사무실 한켠에는 어김없이 귤 박스가 놓여 있다. 하나씩 까먹으며 나누는 담소는 고된 현장 업무에 지친 활동가들에게 작은 위로가 된다. 그런데 우리가 무심코 먹는 귤에는 조직 운영의 중요한 통찰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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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이나 마트에서 파는 귤은 유난히 반짝거린다.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왁스칠'을 하기 때문이다. 과학적으로 이 왁스 코팅(Wax Coating)은 귤 껍질의 수분 증발을 억제하여 표피가 쭈글쭈글해지는 것을 막고, 유통 과정에서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된다. 하지만 이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인위적인 코팅막이 귤 표피의 기공을 과도하게 막아 원활한 호흡(기체 교환)을 방해하면, 귤 내부에서는 산소 부족으로 인한 '무산소 호흡'이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에탄올과 아세트알데히드 같은 물질이 생성되어 귤 고유의 맛이 변질되거나 이취(off-flavor)가 발생하고, 결과적으로 내부 부패를 가속화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매끈하고 예쁘지만, 속에서는 숨이 막혀 곪아가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반면, 제주에서 갓 올라온 '노지 감귤'은 볼품없다. 표면은 거칠고 색도 투박하다. 하지만 이 못난이 귤은 오래간다. 왁스라는 인공의 막이 없기에 껍질이 외부와 끊임없이 호흡하며 생명력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2025년 대한민국 비영리 현장을 돌아본다. 우리는 과연 '노지 귤'인가, '왁스 칠한 귤'인가? 정부 보조금과 후원금, 그리고 까다로워진 대중의 평가 속에서 우리는 언제부턴가 조직의 '광택'에 집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성과 보고서의 화려한 인포그래픽, 보여주기식 행사의 의전, 'ESG 경영'이나 '임팩트' 같은 세련된 용어들로 조직을 코팅하느라 정작 내부 구성원들의 숨구멍이 막히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야 한다.

 

현장의 한 장면을 보자. 사업 결과 보고를 앞둔 회의실, '왁스형(Waxed) 팀장'은 이렇게 말한다. "김 대리, 행사 사진이 이게 뭐야? 좀 더 사람들이 북적이고 임팩트 있어 보이는 컷 없어? 그리고 실패한 사례는 굳이 넣지 말고, 수치 잘 나온 거 위주로 '손질' 좀 해서 가져와. 그래야 외부 평가 잘 받아야 내년 예산 따오지." 이 순간, 실무자의 숨구멍은 닫힌다. 화려한 보고서 뒤에 가려진 현장의 고충과 진짜 배움은 '부패'하기 시작한다.

 

반면 '노지형(Unwaxed) 팀장'의 태도는 다르다. "박 주임, 이번 사업에서 목표치 미달한 원인이 뭐라고 생각해? 아, 현장 접근성이 문제였구나. 그럼 보고서에 그 실패 요인과 시행착오를 진실하게 적자. 그래야 우리도 배우고 후원자들도 우리의 고민을 이해해주지 않을까? 포장은 내가 벗길 테니, 박 주임은 현장의 목소리만 담아줘." 이런 리더 앞에서 실무자는 비로소 숨을 쉰다. 시행착오를 감추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나의 솔직함이 조직의 자산이 된다는 신뢰가 싹튼다.

 

나의 작은집은 제주도다. 예전엔 감귤 농사를 지으셨지만, 지금은 가족들이 먹을 요량으로 몇 그루만 남겨두셨다고 한다. 덕분에 겨울이면 못난이 노지 귤 한 박스를 선물 받는 호사를 누린다. 나는 어릴 적부터 제주의 노지 귤을 먹은 경험이 있어, 그 투박하지만 진한 맛을 잘 안다. 하루는 아내에게 아무 말 없이 이 귤을 툭 건넸다. 한 입 베어 문 아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 이거 어디서 났어? 맛이 완전히 다르네!" 제주 작은집에서 보내온 것이라고 하니, 아내는 "역시~"라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리고는 이 귀한 귤을 더 오랫동안 신선하게 먹겠다며 일반 냉장고가 아닌 김치냉장고 깊숙한 곳에 소중히(?) 넣어두었다.

 

그런데 며칠 뒤, 아침 식사 후 디저트로 그 귀한 귤을 꺼내 먹다가 우리는 서로 얼굴을 찌푸리며 묘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여보, 귤에서... 김치 맛이 나." 새콤달콤해야 할 귤에서 시원털털하고 짭조름한 묵은지 향이 훅 끼쳐왔다. 태어나서 처음 맛보는 '귤+김치'의 기막힌 콜라보레이션이었다. 우리가 흔히 사 먹는 반짝이는 '화장발' 귤은 왁스가 표피를 완벽히 차단하고 있어 김치냉장고에 넣어도 냄새가 배지 않는다. 하지만 왁스 칠 없는 민낯의 노지 귤은 껍질이 살아 숨 쉬며 외부와 소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놓인 환경인 김치냉장고의 냄새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외부의 공기와 냄새를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섞임'과 '스며듦'.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존재가 보여주는 진정한 '소통'의 메타포라고 생각한다.

 

https://www.hrmagazine.co.uk/content/news/social-activism-could-turn-the-workplace-into-a-wokeplace / 사진출처

 

우리 비영리 조직의 리더들도 이처럼 현장의 삶이 온전히 배어드는 '숨 쉬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트랜드한 행사와 이벤트라는 '왁스'로 자신을 코팅한 채 집무실에만 앉아 있는 리더에게서는 현장의 땀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런 리더는 클라이언트의 고통도, 실무자의 번아웃도 냄새 맡지 못한다. 반대로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실무자와 섞이는 리더, 현장의 흙먼지를 뒤집어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리더에게서는 사람 냄새가 난다. 지금 자신의 모습에 곰팡이가 핀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면, 멈춰 서서 내 몸에 덕지덕지 붙은 '꼬리표(Label)'를 점검해보자. '전문가', '센터장', '좋은 일 하는 사람' '공익활동가'라는 직함과 평판을 고유한 나 자신과 동일시하려는 의지는 정작 나 자신과 동료와의 소통을 차단할 수도 있다.

 

비영리(Non-Profit)는 단순히 이윤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영리 조직이 계산하는 효율과 광택 대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숨결'을 선택하겠다는 선언이다. 조금 투박하면 어떤가. 보고서가 조금 덜 세련되면 어떤가. 우리가 서로의 눈을 보고 숨 쉬며, 현장의 아픔을 내 몸의 냄새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썩지 않고 오래도록 단단할 수 있다. 오늘, 팀원들에게 건네는 귤 하나에 왁스 대신 진심을 담아보자. "포장하느라 애쓰지 마세요. 당신의 본연의 모습 그대로가 우리 조직의 가장 큰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