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교육콘텐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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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콩나물시루]

[주민자치칼럼] 사회적 자본을 쌓는 첫 단추, “당신의 이름은 선명합니까?”

강정모 소장 2025. 12. 15. 15:38

우리는 바야흐로 ‘선진국’이라 불리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습니다. 과거의 성장이 도로를 닦고 건물을 올리는 ‘하드웨어’ 중심이었다면, 성숙한 선진 사회의 핵심 동력은 보이지 않는 신뢰와 네트워크, 바로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입니다. 주민자치회는 우리 마을의 사회적 자본을 축적하는 가장 최전선의 조직입니다. 그렇다면 이 거창해 보이는 사회적 자본은 어디서부터 시작될까요? 거대한 담론이나 정책이 아닙니다. 바로 옆에 앉은 위원에게, 그리고 주민들에게 건네는 ‘자기소개’, 이것이 그 첫 단추입니다.

 

https://mywebring.com/foreigner-korean-interview-intro / 사친출처

 

‘쇼미더머니’에 나간 공무원, ‘암호’를 대는 회장님

 

연말이 다가오니 전국 곳곳에서 성과공유회와 주민총회 열기가 뜨겁습니다. 그런데 현장을 다니다 보면 한 가지 흥미롭고도 안타까운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마이크만 잡으면 본의 아니게 ‘속도전’을 벌이는 분들입니다. 먼저 공무원(주무관, 팀장, 과장)의 경우를 볼까요? 한 해 동안 고생한 성과를 발표하는 중요한 자리, 말끔하게 차려입고 단상에 오릅니다. 그런데 정작 입을 떼는 순간, 긴장과 열정이 섞여 래퍼가 빙의합니다. “안녕하심까~행정복지센터총무팀주무관홍길동임다경과보고드리겠슴다.” 쫓기는 사람처럼 후다닥, 작은 목소리로 자신의 소속과 이름을 1초 만에 숨 가쁘게 쏟아내십니다. 주민자치회의 얼굴인 회장님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주민총회라는 가장 엄중하고 권위 있는 자리, 사회를 보기 위해 마이크를 잡았는데 익숙한 나머지 마치 비밀번호를 대듯 빠르게 지나갑니다. “반갑슴다~행복동주민자치회장김자치임다.” 마치 누군가에게 들키면 안 되는 암호를 대듯, 나직하고 빠르게 읊조리며 본론으로 넘어갑니다.

 

듣는 주민들은 당황합니다. “방금 뭐라고 한 거야? 무슨 팀장? 누구 회장?”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바로 ‘익숙함의 함정’ 때문입니다. 나의 이름과 직함은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익숙한 정보입니다. 수천 번, 수만 번 듣고, 아는 사람들과 소통했기에 내 뇌는 이 정보를 처리하는 데 0.1초도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남들도 다 알겠지’, 혹은 ‘빨리 말하고 본론으로 넘어가야지’라고 착각하며 속도를 높이게 됩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객석에 앉은 주민들에게 나의 이름은 난생처음 듣는 낯선 정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내가 흘려서 말한 그 1초 사이, 나의 존재감과 리더십은 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맙니다.

 

신뢰는 속도가 아니라 ‘명료함’에서 온다

 

공적인 자리에서의 자기소개는 단순한 인사가 아닙니다. ‘나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라는 무언의 선언이자, 청중의 주의를 집중시키는 ‘권위의 버튼’입니다. 두 가지 경우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1. (후다닥) “안녕하세여시민교육콘텐츠연구소강정모소장임다반갑습니다.”
  2. (여유 있게) “안녕하십니까. (잠시 멈춤) 시민교육콘텐츠연구소의 (잠시 멈춤) 강. 정. 모. 소장입니다.”

어느 쪽이 더 전문가답고 신뢰가 가십니까? 당연히 두 번째입니다. 목소리를 꾸미거나 화려한 수식어를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내가 속한 곳과 나의 이름을 선명하게, 끊어서, 또박또박, 천천히 말하는 것만으로도 청중의 집중도는 달라집니다. 명료한 소개는 나의 발언에 무게를 실어주고, 결국 나의 영향력을 높여 나에게 이익으로 돌아옵니다. 이것이 바로 현명한 리더의 공적 태도입니다. 

 

공적소개를 잘 하기 위한 가장 좋은 연습 상대는 ‘가족’입니다. 동료 위원들은 “아유, 회장님 바쁘시니까 말이 빠르시네” 하고 이해해 주지만, 가족은 냉정합니다. 쑥스러움을 이겨내고 가족 앞에서 또박또박 소개하는 연습을 해보십시오. 그 어색함을 돌파해야 낯선 주민들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습니다.

 

관계의 밀도를 높이는 소개의 기술

 

이름을 명확히 알리는 것이 ‘첫 단추’라면, 그 다음 단추는 서로의 마음을 연결하여 관계의 밀도를 높이는 것입니다. 회의 때마다 똑같은 직함과 이름만 반복하는 것은 지루하고, 우리를 ‘기능적인 관계’에 머물게 합니다. 주민자치는 ‘일’을 하는 조직이기에 앞서 ‘사람’이 모이는 곳입니다. 딱딱한 회의 식순에 앞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스몰 토크(Small Talk)’의 시간을 가져보시길 권합니다. 예를 들어 ‘마음의 날씨’를 나눠봅니다. “오늘 저의 마음 날씨는 ‘소나기’입니다. 아침에 급한 일이 터져서 정신이 없었거든요.” 이렇게 현재의 감정을 날씨에 비유해 나누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의 상황을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또는 ‘나를 설레게 하는 키워드’나 ‘올해 꼭 이루고 싶은 성취’를 공유해 보십시오. “저는 요즘 ‘반려 식물’에 푹 빠져 있습니다”라는 한마디가, “어? 저도 식물 좋아하는데!”라는 공감대로 이어져 예상치 못한 협력의 불씨가 되기도 합니다. 조금 더 나아가면, 종이에 서로의 얼굴을 그려주는 ‘자화상 그리기’나, 가위바위보를 하며 서로의 얼굴에 스티커를 붙여주는 ‘미꾸라지 액션’ 같은 활동도 좋습니다. 체면을 내려놓고 함께 웃고 떠드는 사이, 우리 마음속의 벽(Wall)은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단단한 신뢰의 다리(Bridge)가 놓이게 됩니다.

 

선명한 이름 뒤에 따뜻한 환대를 담아

 

주민자치 위원 여러분, 우리는 주민의 대표로서 공적인 자리에 서 있습니다. 익숙함으로 나의 이름을 흘려보내지 마십시오. 나의 소속과 이름을 소중히 다루어 상대방에게 천천히, 크고, 선명하게 전달하십시오. 그것이 타인에 대한 우정이자, 나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 명료한 이름 뒤에, 서로의 안부를 묻고 웃음을 나누는 따뜻한 ‘환대’를 덧붙이십시오. 그렇게 쌓인 신뢰가 마을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힘, 사회적 자본이 될 것입니다.오늘 회의, 옆 자리에 앉은 위원님께 랩퍼처럼 빠르게 말고, 아나운서처럼 명료하게 인사를 건네보는 건 어떨까요?

 

“반갑습니다. 저는, (잠시 멈춤) OO읍면동 주민자치위원, (잠시 멈춤) O.O.O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