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자치 교육 현장에서 전국의 많은 위원님을 뵙다 보면 한결같은 고민을 듣게 됩니다. “소장님, 우리 마을을 정말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은데,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가 참 어렵습니다.” 마을의 문제를 해결하고 발전시키는 힘, 즉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을 쌓아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도대체 그 보이지 않는 신뢰와 네트워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요?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저는 오늘 위원님들께 조금 낯설지만, 우리가 하는 일의 진짜 의미가 담긴 질문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환대(Hospitality)는 편안함의 해체이고, 해체는 타인에 대한 환대이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말입니다. 문장이 다소 어렵게 느껴지시나요? 하지만 이 속에는 주민자치의 핵심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데리다는 말합니다. 진정한 환대란 ‘나의 집(at-home)’, 즉 나에게 익숙하고 편안한 질서를 부수고(해체), 그 틈으로 낯선 타인을 맞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내가 편안한 상태를 고수하면서 남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에게 익숙한 이솝 우화 ‘여우와 황새’ 이야기를 꺼내 봅니다. 여우는 황새를 골탕 먹이려고 납작한 접시에 수프를 담아 주었을까요? 아닙니다. 여우는 황새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장 아끼는 접시에, 정성껏 요리를 담아 ‘최선을 다해’ 대접했습니다. 문제는 그 방식이 ‘자기중심적’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여우에게는 최고의 식탁인 납작한 접시가, 긴 부리를 가진 황새에게는 모욕이 되었습니다. 결국 황새도 호리병에 음식을 담아 여우에게 복수하며 관계는 깨지고 맙니다.

마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헌신하는 우리 주민자치 위원님들도, 가끔은 여우처럼 본의 아니게 서로의 마음을 놓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마을을 위해 좋은 의도로 열심히 봉사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있지요. 제가 만난 한 주민자치위원장님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그 마을에서는 어르신들의 건강을 위해 야심 차게 ‘마을 한 바퀴 걷기 대회’를 준비했습니다. 경치가 좋은 산책로를 골라 왕복 1시간 코스를 짰지요. 위원장님 생각에는 “이 정도면 가벼운 산책”이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행사 당일, 어린이를 데리고 온 부모, 유모차를 밀거나 지팡이를 짚고 나오신 노인들은 힘들어 하셨습니다. 위원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내가 내 튼튼한 다리(여우의 접시)로만 거리를 쟀지, 주민들의 불편한 다리(황새의 부리)는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21세기 선진 시민의 역량은 이처럼 ‘나의 열심’을 넘어, ‘나의 편안함’을 해체하고 상대방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살피는 데서 시작됩니다. 내가 가진 둥근 접시를 깨뜨려야 황새의 긴 부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데리다와 이반 일리치 신부가 말한, 낯선 타인을 친구로 만드는 ‘사회적 자본’의 출발점입니다. 이반 일리치(Ivan Illich) 신부는 “서구 전통에서 우정은 정치의 최고 단계의 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진정한 공동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누군가가 먼저 용기 내어 문지방을 낮추고 낯선 이를 맞아들인 ‘환대’의 결과물일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수많은 미디어로 연결된 듯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타인을 내 삶의 식탁으로 초대하는 ‘진짜 만남’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국의 주민자치위원 여러분은 어떻게 이 소중한 가치를 실천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 구체적인 ‘첫 단추’로 ‘자기소개’를 제안합니다. 회의나 행사 때 여러분은 어떻게 인사하십니까? “반갑습니다홍길동입니다”라고 웅얼거리듯 흘려보내지는 않으신지요? 익숙한 나의 이름과 직함은 나에게만 편안합니다. 처음 만나는 주민에게 나의 빠른 말투는 불친절한 ‘여우의 접시’일 뿐입니다. 내 입에 익숙한 속도를 버리고(해체), 낯선 상대방의 귀에 꽂히도록 “주민자치위원, 홍. 길. 동. 입니다”라고 천천히, 또박또박 끊어서 말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신뢰도가 높아, 이후의 발언의 주목도도 높아집니다. 나의 편안함을 해체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그 작은 행위가 바로 타인에 대한 환대이자, 나의 공신력을 높이는 사회적 자본의 기초가 됩니다. 쑥스럽더라도 가족 앞에서, 거울 앞에서 연습하며 그 어색함을 돌파해야 비로소 내 몸에 ‘환대의 근육’이 붙습니다.

정현종 시인은 <방문객>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사람이 온다는 건 /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 그는 / 그의 과거와 / 현재와 / 그리고 /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주민자치센터 문을 열고 들어오는 주민 한 분, 회의 테이블에 마주 앉은 위원 한 분은 그저 민원인이나 동료가 아닙니다. 한 사람의 일생이, 부서지기 쉬운 마음이 우리에게 걸어오는 것입니다. 그 어마어마한 방문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는 기꺼이 나의 익숙함을 해체하고 ‘마음의 문지방’을 낮춰야 합니다. 사랑하는 전국의 주민자치위원 여러분, 여러분이 만드는 주민자치회는 단순히 행정 업무를 처리하는 곳이 아닙니다.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 나오는 톱밥 난로처럼, 낯선 이들이 모여 서로의 눈꽃 같은 이야기를 듣고 온기를 나누는 곳이어야 합니다. 정호승 시인의 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쉴 수 있는 ‘그늘’이 되어주는 곳이어야 합니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는 시인의 통찰처럼, 나 혼자 빛나려 하기보다 기꺼이 이웃을 위한 ‘한 그루의 그늘’이 되어주십시오. 그리고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그런 다정한 환대와 우정을 실천해 주십시오.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는 그 고요한 아름다움이 쌓일 때, 우리 마을은 비로소 환대와 우정이 흐르는 신뢰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이 쌓고있는 ‘사회적 자본’이라는 집입니다. 오늘부터 실천해 보십시오. 여우의 접시를 깨고, 황새를 맞이할 준비를. 그리고 타인을 향해 명징하고, 선명하게 자신의 이름을 건네십시오. 그 울림에서 우리 마을의 변화는 시작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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