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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콩나물시루]

활시위를 떠난 화살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_올챙이의 뒷모습과 칼릴 지브란의 예언

강정모 소장 2025. 12. 3. 22:44

아이들이 잡아 온 올챙이들이 기어이 개구리가 되었습니다. 올챙이 시절엔 다 고만고만하더니, 개구리가 되니 파란 놈, 까만 놈, 절벽에 붙어 있는 놈 제각각입니다. 밤마다 들려오는 "꿀럭꿀럭" 소리에 식구가 늘어난 것 같아 아이들은 신이 났지만, 사실 저는 죽을 맛이었습니다. 고백하건대, 저는 이 나이 먹도록 개구리가 무섭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이 가장인 저를 놀려먹기 딱 좋은 소재였지요.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이 "개구리가 굶어 죽을 것 같으니 풀어주자"고 제안했습니다. 저는 반가운 내색을 꾹 참고 격하게 동의하며 당시 제가 살았던 광명 도덕산으로 향했습니다. 패트병에 담긴 개구리들을 저보고 들어달라는데, 징그러움을 꾹 참고 짐짓 근엄한 목소리로 훈계를 던졌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에는 책임이 따르는 거야. 너희가 들고 가거라." (사실은 무서워서 못 만진 겁니다).

 

blog.naver.com/twksomee/221964881339 / 사진출

 

산에 도착해 개구리들을 풀어주었습니다. 녀석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뒤도 안 돌아보고 제 갈 길을 가더군요. 지극정성으로 키운 아이들은 쿨하게 "잘 가!" 한 마디를 던지곤 다른 놀거리를 찾아 뛰어갔습니다. 이처럼 아이들이 정성껏 키운 개구리들을 도덕산 계곡에 풀어주던 날을 기억합니다. 뒷다리가 쑥, 앞다리가 쑥 나오고 꼬리가 짧아진 개구리들은 물을 만나자마자 뒤도 한번 안 돌아보고 제 갈 길을 갔습니다. 그 매정하리만치 쿨한 뒷모습에 서운함을 느낀 건, 정작 녀석들을 징그러워하며 만지지도 못했던 저였습니다. 아이들은 오히려 "잘 가!"하고는 쿨하게 돌아서더군요.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56668 / 사진출

 

그 순간, 저는 묘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어쩌면 저 개구리들의 뒷모습이, 언젠가 내 품을 떠날 아이들의 미래와 닮아있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서재에 꽂혀있던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를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 책 속의 문장들은 마치 그날 계곡에서의 일을 예견이나 한 듯, 부모인 저의 가슴을 서늘하게, 때로는 뜨겁게 두드렸습니다. "그대들의 아이들은 그대들의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삶을 갈구하는 생명의 아들이자 생명의 딸입니다." 우리는 흔히 아이를 '내 새끼', '내 분신'이라 부르며 소유의 울타리에 가두려 합니다. 하지만 지브란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아이들은 우리를 '거쳐서' 왔을 뿐, 우리에게서 '나온' 소유물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계곡으로 사라진 개구리들이 제 것이 아니었듯, 내 아이 또한 내 소유가 아닙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만의 생명력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온 독립적인 존재들입니다.

 

부모는 늘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똑똑한 아이로 키울 것인가, 독립적인 아이로 키울 것인가.' 혹은 '말 잘 듣는 착한 아이가 좋을까, 자기주장이 강한 독립적인 아이가 좋을까.' 욕심 같아선 둘 다였으면 좋겠지만, 신은 공평해서 대개 둘 중 하나만 주십니다. 당장은 부모 말을 잘 듣고 공부 잘하는 '똑똑한 아이'가 예쁘고 편합니다. 하지만 조금 더 긴 호흡으로 보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말 잘 듣는 아이'는 부모의 보호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안전하지만, '독립적인 아이'는 울타리 밖 거친 세상에서도 살아남습니다. 결국 양육의 최종 목적지는 품 안에 두는 것이 아니라, 떠나보내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들이 가장 범하기 쉬운 오류 중 하나는 내 경험과 내 생각을 아이에게 주입하려는 것입니다. "너는 커서 의사가 되어야 해", "이 길은 위험하니 가지 마".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이 조언들이 어쩌면 아이의 영혼을 잠식하는 족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지브란은 이렇게 조언합니다. "아이들에게 그대들의 사랑을 주되 그대들의 생각까지 주지는 마십시오. 아이들 스스로도 생각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 더 나아가 그는 "아이들의 영혼은 그대들이 꿈에서라도 감히 찾을 수 없는 '내일의 집'에 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독립을 시키는 것은 자신에 대한 사랑이고, 독립을 시키지 못하는 것은 사랑을 빙자한 자기애일 뿐입니다. 개구리가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는 것이 야속할지 몰라도, 그것이 생태계에서 살아남는 가장 건강한 본능입니다. 우리 아이들도 언젠가 저 개구리들처럼 부모를 뒤로하고 자신의 숲으로 거침없이 뛰어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제와 오늘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우리가 가볼 수 없는 내일이라는 집에 살 사람들입니다. 과거의 지도로 미래의 길을 안내하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삶이란 결코 뒤로 돌아가는 법도, 어제와 함께 머무르는 법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이들을 우리와 같이 만들려고 애쓰는 대신, 우리가 아이들의 내일을 방해하지 않도록 뒤로 물러서 주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부모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방관자가 되라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칼릴 지브란은 부모의 역할을 '활'에 비유했습니다. "그대들은 활이며, 그 활에서 아이들은 살아 있는 화살처럼 앞으로 나아갑니다." 사수는 무한한 징표 위에서 과녁을 겨냥하고, 자신의 화살이 날렵하고 멀리 날아가도록 온 힘을 다해 활을 구부립니다. 활인 부모가 겪는 그 구부러짐의 고통, 그 인내와 헌신이 있기에 화살인 아이들은 더 멀리, 더 높이 날아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활시위를 떠난 화살은 결코 활을 향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화살의 목적은 활이 아니라 과녁입니다. 활이 화살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면, 그 화살은 땅바닥에 처박히거나 아무 쓸모 없는 막대기가 될 뿐입니다. 

 

www.facebook.com/p1p4p/post / 사진출처

 

도덕산 계곡의 개구리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 것은 배신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본능이자, 살아남기 위한 가장 건강한 몸짓이었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그래야 합니다. 부모가 만들어준 안락한 어항 속에 머무는 '착한 아이'보다는, 거친 물살을 가르며 자신의 바다로 나아가는 '독립적인 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아이와 씨름하고 계신가요? 아이가 내 뜻대로 되지 않아 불안하신가요? 그렇다면 기억하십시오. 당신은 지금 아주 튼튼한 활이 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아이는 당신이라는 활을 박차고 나가, 당신이 꿈에서도 가보지 못한 '내일의 집'을 향해 날아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아이가 내 품을 떠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갈 때, 섭섭해하기보다는 자랑스럽게 그 뒷모습을 응원해줍시다. 훌륭한 사수의 손에서 떠난 화살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 법이니까요. 그것이 부모인 우리가 완성해야 할 사랑의 마지막 퍼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