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코로나팬테믹, 러우전쟁, 대한민국 내란정국에서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저) 서평을 다시 쓰다

어느 날 우연히 들른 중고서점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눈물 흘리는 아이의 표지와 마주쳤습니다. 출판된 지 20년이 훌쩍 넘은 장 지글러의 고전,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였습니다. 책장을 넘기다 만난 저자의 문장은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가슴을 파고들었습니다. 기아 희생자들과 우리를 갈라놓는 것은 단지 출생의 우연뿐이다."
2025년의 대한민국, 그리고 세계를 돌아봅니다. 이 문장은 여전히 유효할까요? 슬프게도 그렇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잔혹해졌습니다. 팬데믹이 할퀴고 간 자리는 '백신 격차'와 '돌봄 공백'으로 남았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가자 지구의 포성은 식량 위기를 '무기화'하며 가장 약한 이들의 삶부터 파괴했습니다. 태어난 곳이 어디냐에 따라 생사가 갈리는 이 '잔인한 룰렛'은 지금도 멈추지 않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표지 속 아이의 얼굴에 내 어린 시절이, 그리고 우리 이웃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기아와 빈곤을 어쩔 수 없는 천재지변이나 개인의 불운으로 치부하곤 합니다. 하지만 장 지글러는 단호하게 고발합니다. "기아로 인한 죽음에는 어떠한 필연성도 없다. 기아로 죽는 어린아이는 살해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지구상에는 120억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식량이 생산됩니다. 그런데 왜 누군가는 굶어 죽고, 누군가는 배가 터지도록 먹을까요? 과거에는 독재자가 그 원흉이었다면, 지금은 매끈하게 포장된 '금융자본'과 '전쟁이라는 괴물'이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이것은 시스템의 실패이자, 명백한 구조적 살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절망 대신 '민주주의'라는 희망의 근거를 찾아야 합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아마르티아 센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기근은 발생하지 않는다"고 단언했습니다. 1980년대 아프리카 대기근 당시를 기억해 봅시다. 군부 독재 치하였던 에티오피아는 100만 명 이상의 아사자를 냈지만, 민주주의가 작동했던 보츠와나의 아사자는 '0명'이었습니다. 심지어 식량 생산량은 에티오피아가 더 많았음에도 말입니다. 그 차이는 무엇이었을까요? 보츠와나는 정부가 취약계층에게 식량을 직접 배분하고 일자리를 만들어 구매력을 유지시켰습니다. 선거가 있고, 언론의 비판이 살아있으며, 권력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사회였기에 정부는 국민을 굶어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즉, 굶주림을 해결하는 것은 자비로운 독재자의 시혜가 아니라, 깨어있는 시민들의 민주적 요구와 감시입니다. 민주주의는 투표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밥상 위에, 그리고 벼랑 끝에 몰린 이웃의 삶 속에 존재해야 합니다.
각자도생을 강요받는 이 시대, NGO 활동 현장에 계신 여러분의 어깨가 더욱 무겁습니다. 때로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아 무력감을 느끼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기억해주십시오. 여러분이 현장에서 건네는 것은 단순한 빵 한 조각이나 구호 물품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출생의 우연'이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지 않도록 온몸으로 막아내는 '민주주의의 최후 저지선'입니다. 여러분의 활동은 무너진 시스템을 고치는 가장 구체적인 정치 행위이자,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숭고한 투쟁입니다.
책의 말미,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말이 묵직한 울림을 줍니다. "신에게는 우리들의 손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세상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도 그 일을 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구조적 폭력에 의해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우리는 계속해서 연결되고, 행동하고, 시스템을 향해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여전히, 그리고 치열하게 현장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칼럼 [콩나물시루]'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개구리가 된 아이에게 '물'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 (0) | 2025.12.06 |
|---|---|
| 활시위를 떠난 화살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_올챙이의 뒷모습과 칼릴 지브란의 예언 (0) | 2025.12.03 |
| '떠나는 용'을 부러워하는 세상에서, '개천을 지키는 나무'로 산다는 것 (0) | 2025.12.02 |
| 리더의 언어는 '침묵'에서 시작된다 (0) | 2025.12.02 |
| '빨래 개기'의 숭고함: 엔트로피에 맞서는 조직의 위대한 살림꾼들에게 (0) | 2025.1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