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5년 여름, 우리 가족은 함양의 깊은 계곡으로 휴가를 떠났다. 유난히 가물었던 탓인지 얕아진 계곡물 덕분에 아이들은 생애 최초의 '대량 포획'을 경험했다. 잽싼 올챙이들도 아이들의 서툰 손길을 피하지 못했고, 우리는 그 새까맣고 실한 '함양산 올챙이'들을 담아 집으로 돌아왔다. 호기심에 한두 마리 데려온 수준이 아니었다. 좁은 페트병 하나에 이십여 마리가 꽉 들어차, 흡사 '출근길 지옥철'을 방불케 하는 올챙이 떼가 까만 콩자반처럼 뒤엉켜 있었으니, 그때부터는 '관찰'이 아니라 '노동'이 시작되었다. 영악한 녀석들은 슬금슬금 그 노동을 엄마 아빠에게 떠넘기려 했지만, 나와 아내는 흔들리지 않았다. "너희가 데려왔으니 너희가 책임져라." 우리는 아이들이 스스로 감당하도록 한 발 물러섰다.
함양의 정기를 받아서일까, 녀석들은 먹기도 잘 먹고 싸기도 엄청나게 싸댔다. 밥풀 몇 개 정도 먹는데, 배설물은 어찌나 많은지 물은 금세 탁해졌다. 아이들에게 좁은 병의 물갈이는 고역이었다. 한 번은 병을 엎어 거실 바닥이 온통 올챙이 천지가 된 적도 있었다. 온 가족이 달라붙어 바닥에서 꼬물거리는 생명들을 구조해냈다. 그때 사고를 친 큰 아이의 눈에 고였던 그 알 듯 모를 듯한 눈물은 미안함이었을까, 실수했다는 부끄러움이었을까.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아이들은 물갈이 선수가 되었고, 올챙이들은 뒷다리가 쑥, 앞다리가 쑥 나오며 변해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병에 코를 박고 아주 작은 변화라도 발견하면 내게 달려와 보고하는 것이 하루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토록 기다리던 개구리가 되었는데, 녀석들이 하나둘씩 죽어나가는 것이었다. 물을 더 깨끗이 갈아줘도, 먹이를 최고급으로 챙겨줘도 소용이 없었다. 온 가족이 멘붕에 빠져있던 그때, 시골 출신인 아내가 무릎을 탁 쳤다. "맞다! 개구리는 허파 호흡을 하잖아! 물속에만 있으면 익사해!" 아내는 당장 창고에 처박혀 있던 수조를 꺼내 돌을 쌓아 언덕을 만들고 개운죽을 심어주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개구리들은 돌 위로, 나무 위로 기어올라가 숨을 쉬며 활기차게 살아났다. 그제야 우리는 올챙이에게 최고의 환경이었던 '가득 찬 물'이 개구리에게는 '죽음의 공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환경을 바꿔주지 않으면 성장은 곧 죽음이 된다는 서늘한 진리를 확인한 것이다.

이 작은 소동은 10년이 지난 지금, 청소년이 된 아이들을 키우는 나에게, 그리고 사람을 대하는 수많은 부모와 사회복지 종사자들에게 깨달음으로 연결된다. 우리는 종종 아이가 이미 '개구리'로 성장했음을 망각한다. 뒷다리가 나오고 꼬리가 없어졌는데도, 부모는 여전히 아이를 '올챙이' 취급하며 자신의 통제하에 두려 한다. 아이는 이제 폐로 숨을 쉬고 싶어 세상 밖으로, 관계 밖으로 나가려 하는데, 부모는 "너를 위해서"라며 깨끗한 물(간섭과 보호)을 채집통 가득 채워 넣는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우리는 마찰이 없는 미끄러운 얼음판으로 들어섰다. 어떤 의미에서 그 조건은 이상적인 것이었지만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걸을 수 없게 되었다"고 말했다. 부모가 제공하는 무균실 같은 환경, 실패가 제거된 삶은 언뜻 보기에 마찰이 없는 이상적인 '얼음판'처럼 보인다. 하지만 숨 쉴 곳 없는 아이는 그 사랑의 물속에서, 그 미끄러운 얼음판 위에서 질식하고 만다. 아이들이 걷고 싶다면,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면 그들에게는 딛고 일어설 마찰, 즉 '거친 땅'이 필요하다.
성장한다는 것은 단순히 몸집이 커지는 것이 아니다. 호흡법이 바뀌고, 노는 물이 바뀌고, 필요한 먹이가 달라지는 것이다. 아이가 자랄 때마다 부모 역시 변태(變態)에 가까운 변화를 겪어야 한다. 지시하고 관리하던 '양육자'의 태도에서, 지켜봐 주고 쉴 곳을 내어주는 '조력자'의 태도로 환경을 리모델링해야 한다. 이는 사회복지 현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만나는 클라이언트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이 위기를 극복하고 내면의 힘을 키워 성장(성숙)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그들을 처음 만났을 때의 '도움이 필요한 나약한 존재'로만 규정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올챙이 시절의 매뉴얼을 고집하며 개구리가 된 그들에게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들을 다시 '마찰 없는 얼음판' 위에 가두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변화는 두렵고 귀찮은 일이다. 아이들이 낑낑대며 물을 갈아주던 그 수고로움처럼, 부모가 자신의 태도를 바꾸고 실무자가 관점을 바꾸는 일은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그 수고를 감내하지 않으면, 소중한 관계가 힘들어질 수 있다.
당신의 아이는, 혹은 당신이 돕고 있는 누군가는 지금 어떤 모습인가? 혹시 물속에서 뻐끔거리며 "제발 숨 쉴 돌멩이 하나만 놓아달라"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고 있지는 않은가. 이제 과감히 물을 덜어내자. 그리고 그들이 딛고 올라설 수 있는 단단한 바위 하나를 놓아주자. 비로소 그들은 그 위에서 힘차게 뛰어오를 것이다. 서툰 손으로 올챙이를 잡던 그 여름날의 아이들이, 이제는 어엿한 청소년이 되어 자신의 세상을 향해 뛰어오르는 것처럼. 성장통을 겪고 있는 모든 부모와 종사자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당신이 만들어준 그 새로운 환경(거친 땅) 위에서, 우리의 개구리들은 비로소 진짜 숨을 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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