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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칼럼[콩나물시루]

이름 붙일 수 없는 고통은 치유될 수 없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세계다

강정모 소장 2026. 3. 16. 09:56

인문은 사람이 그린 무늬다

인문(人文)은 사람이 그린 무늬입니다. 사람은 수많은 무늬를 남겨왔습니다. 문자의 탄생은 무늬를 폭발적으로 늘렸습니다. 공교육은 그 팽창에 가속도를 붙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은 때로 빈약한 언어와 마주합니다. 언어의 양은 방대하나, 나를 설명할 재료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해상도'로 인식합니다. 언어가 빈약한 상태는 저해상도의 흑백 화면과 같습니다. 사물의 윤곽은 보이나 세밀한 결은 보이지 않습니다. 일상을 몇 가지 상투적인 단어로만 규정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거친 입자의 모자이크로 방치하는 것과 같습니다. 고해상도의 삶을 위해서는 정교하고 풍성한 언어라는 재료가 필요합니다.

사고의 해상도가 인격을 결정한다

사고는 태도와 행동을 결정하는 바탕입니다. 그 사고의 재료가 바로 언어입니다. 언어의 해상도가 곧 사고의 해상도를 결정합니다. 우리가 언어와 사고의 연결성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는 '자기 통제력' 때문입니다. 언어라는 수단으로 자기통제가 안 되면, 폭력이 그 수단을 대체합니다. 그래서 폭력의 반대는 논술이라는 도올 김용옥 선생의 진술은 이런 뜻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언어는 사고를 구성합니다. 사고는 인격을 나타내는 신호입니다. 결국 인격은 그 사람이 구사하는 언어의 층위와 같습니다. 언어는 인격을 조절하고 재구성합니다. 무의식의 지배에서 벗어나 언어로 자신을 조절하는 인격체로 진화하는 과정, 이것이 바로 '인문 과정'입니다. 

이름 붙이는 자가 삶을 통제한다

인문이 바탕이 되어야 교양이 가능합니다. 교양은 '자유롭게 되는 역량(Liberal Arts)'입니다. 이는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자유를 누리는 능력입니다. 즉, 삶을 스스로 조절하는 힘입니다. 이 힘은 자신의 상황을 정확하게 '명명(Naming)'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저개발국에서 일어난 놀라운 변화가 이를 증명합니다.

 

[실제 사례: 엘살바도르의 '리플렉트(Reflect)' 학습법] 1990년대 엘살바도르의 빈곤 지역에서 국제구호개발기구 액션에이드(ActionAid)가 시행한 문해 교육 사례입니다. 기존의 주입식 교육 대신, 주민들은 마을의 지도를 직접 그리고 자신들이 겪는 고통(토지 분쟁, 식수 문제 등)에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히 글자를 깨치는 것을 넘어, 자신들의 억압된 현실을 구체적인 언어로 정의하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름을 붙임으로써 비로소 문제를 '객체화'하고 통제할 수 있게 된 주민들은, 스스로 농업 협동조합을 결성하고 정부에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며 삶의 주권을 회복했습니다. (출처: David Archer & Patrick Costello, 『REFLECT Mother Manual』)

엘살바도르 리플렉트(Reflect) 사례 상세

  1. 배경과 특징
    • 발단: 1993년~1995년, 국제구호단체 액션에이드(ActionAid)가 엘살바도르, 우간다, 방글라데시에서 수행한 실행 연구 프로젝트입니다.
    • 핵심 원칙: 교과서(Textbook)가 없습니다. 주민들이 직접 마을 지도, 농사 달력, 자원 도표를 그리며 그들의 실제 삶 속에서 단어를 추출합니다.
    • 성과: 엘살바도르의 경우, 내전 직후 전직 게릴라들이 포함된 풀뿌리 단체들과 협력하여 진행되었습니다. 글자를 배우는 것을 넘어, 주민들이 자신들의 토지 분쟁이나 보건 문제를 '명명'하고 조직적으로 해결하는 **'권리 기반 접근(Rights-based Approach)'**의 단초가 되었습니다.

민주주의의 기초, 시민의 풍성한 언어

익숙한 일상을 낯설게 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나의 진실을 말하는 연습도 중요합니다. 말로 통치하는 민주주의의 토대는 바로 이 '언어적 실천'에 있습니다. 시민들의 언어가 풍성해질수록 민주주의 사회의 질은 높아집니다. "어떤 일이든 일단 이름을 정확히 붙이고 나면 어느 정도의 통제력은 확보한 셈이다." 정신과 의사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스캇 펙의 통찰처럼, 명명하는 행위는 혼돈을 질서로 바꾸는 첫걸음입니다.

 

현장 전문가를 위한 지혜의 갈무리

시민단체 활동가와 사회복지사 여러분, 우리의 현장은 언어가 탄생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주민조직과 지역복지의 성패는 주민들이 자신의 삶을 얼마나 고해상도의 언어로 묘사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주민의 결핍을 대신 채워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민이 자신의 고통과 욕구에 정확한 이름을 붙일 수 있도록 돕는 '인문적 촉진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민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정의하고 통제할 수 있는 언어를 갖출 때, 복지는 시혜를 넘어 진정한 자유와 자치로 나아갑니다. 현장의 목소리를 세밀한 언어로 길어 올리는 인문적 역량, 그것이 우리가 갖추어야 할 가장 강력한 전문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