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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칼럼[콩나물시루]

좋은 의도가 때로는 짐이 될 때 : 주민의 속도에 맞추어 쪼개고 넓히는 주민조직화

강정모 소장 2026. 7. 5. 09:57

성장이 아닌 성숙으로, 정답이 아닌 합의를 찾아가는 여정

현장의 사회복지사들은 늘 조급함과 싸우기 마련입니다. 연간 사업계획서에 적힌 일정표와 성과 지표,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가시적인 결과물들은 실무자의 어깨를 무겁게 합니다. 특히 지역복지와 주민조직화를 담당하는 이들에게 '주민의 주체성'이나 '지속가능한 자립'이라는 단어는 이상적으로는 아름답지만, 현실에서는 손에 잡히지 않는 신기루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민조직화는 세련된 기능을 익힌 주민 강사를 양성하거나, 연말에 전시회를 열어 성과를 증명하는 과정이 아니라 모임 안에서 주민들이 스스로 일상의 결정권을 행사하고,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갈등을 조정하며, 작고 사소한 책임들을 나누어 맡는 '일상의 민주주의'를 경험하는 긴 호흡의 여정입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은 정답이 아닌 주민들이 토론 끝에 도달하는 합의입니다. 도시의 변두리, 오랜 시간 개발에서 소외되어 다세대 주택이 밀집하고 골목마다 거친 활기와 낙후함이 공존하는 한 임대단지 주변의 종합사회복지관을 떠올려 봅니다. 그곳에서 주민들과 함께 '주민조직화'라는 산을 넘고 있는 담당 사회복지사의 고민을 통해, 우리는 현장 주민조직 사업이 도달해야 할 진정한 이정표를 발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소수 의존형 구조가 안겨주는 조직적 취약성

어느 복지관에나 모임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슈퍼 주민'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손재주가 남다르게 좋거나, 리더십이 뛰어나 주변 사람들을 휘어잡는 방장 한두 명이 모임의 전체 분위기를 주도하곤 합니다. 실무자 입장에서는 이런 핵심 리더들이 고맙고 든든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이 앞장서서 기술을 전수하고 모임을 이끌어주면 초기 형성기와 안정화 단계는 비교적 수월하게 성과를 만들수 있습니다. 담당 사회복지사는 이 훌륭한 주민 리더들과 손발을 맞추며 모임이 아주 잘 운영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초기에서 중기과정으로 가는 순간 이 지점에서 '소수 의존형' 구조의 취약함을 겪게 됩니다. 특정 주민 몇 명과 담당 사회복지사에게 모임의 운영과 기술 전수 역할이 집중될 때, 나머지 참여자들은 점차 '의존적 수동성'에 젖어들게 됩니다. 이들은 매주 모임에 출석하지만, 스스로를 모임의 주인이 아닌 '무상으로 재능을 배우러 오는 취미 클래스의 수강생'으로 자신들을 인식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러한 구조는 '조직적 취약성'을 심화시킵니다. 만약 그 핵심 리더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불참하거나 모임을 떠나게 된다면, 남겨진 주민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게 되고, 구심력을 점차 잃게 되어 흩어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주민조직화는 소수의 리더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다수가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 서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기능 중심의 서열을 깨뜨리는 역할의 다원화 전략

특정 리더 중심의 독점적 구조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과감하게 만들기 실력이나 손재주 같은 '기능 중심의 서열'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역할의 다변화'와 '미니 직책(1인 1역할)'의 도입입니다. 손재주가 좋은 주민은 '기술 전수와 제작 방법 안내'라는 기능적 리더의 역할에 집중하도록 그 범위를 제한해주고, 대신에 만들기는 서툴지만 출석률이 높은 주민, 평소에 남의 말을 다정하게 잘 들어주는 주민, 혹은 꼼꼼하게 무언가를 적기 좋아하는 주민들에게 모임의 새로운 역할을 부여해 주도록 촉진합니다. 거창하고 무거운 '총무'나 '부회장'이라는 전통적 언어 대신, 일상적이고 세분화된 미니 직책으로 역할을 자발적으로 맡는 방법이 있습니다. 예를들면 모임 때마다 따뜻한 차와 간식을 준비하는 '다과반장' , 오랜만에 오거나 새로 참여한 이웃의 안부를 묻고 곁자리를 내어주는 '환영반장' , 오늘 활동한 사진을 찍어 단톡방이나 밴드에 기록으로 남기는 '기록반장', 그리고 활동에 필요한 공구나 부재료의 수량을 점검하고 정리하는 '공구반장' 처럼 직관적이고 사소한 역할을 모두가 나누어 갖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할 분담은 주민 개개인에게 "내가 이 모임에서 필요한 존재구나"라는 효능감을 주며, 소수에게 집중되었던 책임을 골고루 분산시키는 일상 민주주의의 출발점이 됩니다.

제작 공정의 분할이 만들어내는 상호 의존성

한 명의 숙련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을 가르치고 나머지는 이를 수동적으로 따라 하는 방식은 주민 간의 새로운 역학 구조를 형성하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주민조직화의 현장에서는 하나의 완성품을 만드는 공정을 의도적으로 3~4단계로 나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컨대 공예모임이라면 실을 고르고 타래를 푸는 단계, 밑그림을 그리는 단계, 중간 조립을 하는 단계, 그리고 마지막 마무리 매듭을 짓는 단계로 공정을 분할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비록 실력은 부족한 초보 주민이라 할지라도 특정 단계(예: 실 고르기나 마무리 매듭짓기)를 전담하여 다른 동료들을 돕는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이를 통해 "내가 저 사람보다 세련되게 만들지는 못하지만, 이 공정만큼은 내가 가장 잘 도와줄 수 있어"라고 자신을 인식하며, 자존감을 다지고, 조직의 존재이유를 스스로 만들게 됩니다. 이러한 '공정 분할'은 참여자들 사이에 건강한 상호 의존성을 형성해 줍니다. 서로가 서로의 손을 거쳐야만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는 경험을 통해, 주민들은 단순한 취미 동료를 넘어 공동의 과업을 수행하는 긴밀한 연대자로서의 감각을 깨우치게 됩니다.

사회복지사의 의도된 불편함과 권한 이양

주민들이 수동적인 '소비자'로 남느냐, 주체적인 '생산자'이자 '주인'이 되느냐는 담당 사회복지사의 조직운영 태도가 많은 영향을 줍니다. 실무자가 유능하고 부지런하여 모든 행정적 절차, 재료 구매, 연락망 돌리기, 심지어 모임 장소의 세팅과 청소까지 도맡아 하면 주민들은 계속 대접받는 손님으로 머물게 됩니다. 담당복지사는 주민을 위해 모든 것을 해주는 서비스 제공자가 아니라, 주민들이 스스로 움직이도록 판을 짜는 촉진자(Facilitator)의 역할과 위치를 위해 노력하고, 경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여기서 필요한 개념이 바로 '의도된 불편함'입니다. 회의를 진행하고, 단톡방에 공지글을 올리고, 도착한 재료 택배 박스를 칼로 뜯어 정리하는 아주 사소한 일부터 주민들이 직접 결정하고 실행하도록 복지사는 의도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서야 합니다. 복지사가 조금 덜 일하고 조금 더 불편해질 때, 주민들이 비로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납니다. 주민들이 스스로 실수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그 불편함을 자치력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묵묵히 기다려주는 사회복지사의 인내와 여백이야말로 권한 이양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적과 수단의 조화: 본질에 집중하는 주민조직화

우리는 주민조직화 사업 계획을 수립할 때, 종종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초기 주민모임은 대개 느슨한 형태의 사회적 관계 형성이나 주민 간 네트워킹을 목적으로 시작하기 마련입니다. 아직 주민 구성원 스스로가 모임의 목적을 전환하고자 합의하거나 뚜렷한 다른 욕구를 보이지 않았음에도, 사회복지사는 연차별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주민 관계 형성' 이상의 거창한 명분과 방향성을 덧붙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실무자 입장에서는 글쓰기, 뜨개질, 노래, 미술, 업사이클 공예 등 느슨한 주민 동아리가 점차 발전할 때, "이왕 활동하는 김에 친환경 수세미나 주방 세제를 만들어 지역사회에 나누면 사업이 훨씬 전문적이고 시대적 요구에도 부합하지 않을까?" 하는 명분을 고민하게 됩니다. 현장에서 주민들과 함께 호흡하는 복지사라면 누구나 사업에 더 깊은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주민 조직에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일은, 실상 '새로운 목적으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모임의 성격을 환경 활동, 나눔 활동, 혹은 마을의 취약계층을 돕는 활동으로 전환하려면 그에 걸맞은 주민들의 역량과 조직력, 그리고 새로운 목표가 함께 갖추어져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본래 부담 없이 무언가를 배우고, 이웃과 관계를 맺으며, 여가를 보내고 싶어 했던 기존 구성원들은 갑자기 무거워진 새로운 목적을 따라가기가 버거워질 수 있습니다. 주민 간의 내부적이고 자발적인 목적 합의 과정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회복지사의 열정과 욕구가 먼저 투영되면, 모임 안에는 뜻하지 않은 갈등과 혼란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주민들이 처음부터 동네의 환경을 변화시키거나 지역사회의 생태적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문제의식을 지니고 모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들면 담당복지사가 '환경 활동'이라는 새로운 목적을 인위적으로 부여하면, 오히려 기존 모임이 가질 수 있었던 풍성한 상상력과 선택지가 좁아지게 됩니다. 예컨대 주민들이 겨울철을 맞아 목도리나 따뜻한 장갑, 아기 조끼를 만들어 소외된 이웃에게 선물하고 싶어 하더라도, "이것이 우리 사업 계획에 적힌 환경 캠페인과 어떤 상관이 있지?"라는 평가의 잣대 앞에서 주춤하게 되는 것입니다. 담당복지사가 설정한 프레임 안에 갇혀, 주민들과 함께 방향혼란을 겪는 시행착오를 경계해야 합니다. 기왕에 수세미를 만들 때 미세 플라스틱이 없는 친환경 소재의 실을 선택해 보는 소박한 실천이면 충분합니다. 주민들이 가진 재능과 에너지를 있는 그대로 자유롭게 펼칠 수 있도록 판을 열어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이 실무자와 주민 모두의 실천적 부담을 덜고, 주민 동아리 본연의 생동감과 일상의 활기를 오래도록 지속하는 지혜로운 길입니다.

활동을 잘 하는 주민을 강사로 양성할 필요가 있을까? 

중장기 계획의 단골손님인 '주민 리더 및 주민 강사 양성' 역시 깊은 성찰이 필요한 지점입니다. 현장에서는 주민들의 손재주가 깊어지면 자연스럽게 내년에는 이들을 강사로 세워 주변 이웃들을 가르치게 하겠다는 도식적 설계를 당연시하곤 합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수십 년간 잔뼈가 굵은 베테랑 사회복지사라 할지라도 협회나 기관 모임에서 사람들 앞에 서서 강의를 하는 일은 다른 차원의 역량인 것처럼 아무리 취미역량의 달인이라 한들, 타인의 눈높이에 맞추어 알기 쉽게 동기를 부여하며 재미있게 교수하는 능력은 별개의 영역입니다오히려 역량기술에 집중해 양성된 강사는 "나는 이렇게 잘하는데 왜 당신은 이것밖에 못 하느냐"라며 참여 주민들에게 심리적 문턱과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강사란 학습자의 답답함을 견뎌내고 진도가 나가지 않는 순간을 참고, 기다려줘야 하는 에너지가 드는 일입니다. 활동을 잘 하는 근육과 가르치는 근육은 많이 다릅니다. 게다가 복지관이 임의로 '강사'라는 직책과 자격을 부여하고 나면, 실무자는 그분들에게 지속적으로 강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행정적 부담이 생기게 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주민들은 무료 재능기부를 넘어 합당한 강의료와 보상을 기대하게 될 것이고, 제한된 예산 안에서 실무자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외부 강사라면 강의의 질이 떨어질 때 피드백을 주거나 교체할 수 있지만, 내부에서 애지중지 키운 주민 강사에게는 쓴소리 한번 하기가 다소 부담스럽습니다. 주민들을 굳이 '강사'로 양성할 필요가 있을까요? 동네의 다정한 리더이자 이웃으로서 편안하게 활동하는 것이 처음 목적이었습니다. 조직의 활동이력이 쌓이면서 처음의 목적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담당복지사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세대 간 갈등의 지혜로운 전환: 동아리 분화의 기술

뜨개질이나 공예 등 취미모임의 주민동아리는 자연스럽게 참여자들의 연령대나 욕구에 따라 내부적인 갈등이 발생하곤 합니다. 초기에는 중장년층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어르신들에게 기술을 전수하는 아름다운 나눔으로 시작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어르신들은 "내 작품 먼저 봐달라"며 지속적으로 배움과 대접을 요구하는 수동적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 지친 중장년층 리더들은 "우리가 무료 강사도 아니고 왜 이렇게까지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느냐"며 피로감을 호소하고, 결국 주민 간의 갈등으로 심화되어 모임 전체가 정체되는 위기를 겪기도 합니다. 이때 사회복지사가 갈등을 인위적으로 봉합하려 하거나 한쪽의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이 갈등은 모임이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 정체성을 재정립해 달라는 '성숙의 신호'입니다.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는 가장 지혜로운 실천 기술이 바로 '동아리 분화'입니다. 하나의 바구니에 모든 세대와 상이한 욕구를 억지로 담아두지 말고, 참여자들의 역량과 심리적 지향점에 따라 모임을 자연스럽게 독립적인 두 개의 줄기로 쪼개어 주는 것입니다. 기술 전수에 피로감을 느낀 중장년층은 그들끼리 모여 고도화된 작품을 만들고 외부로 자유롭게 뿜어내는 '순수 재능나눔 조직'으로 재편하고, 돌봄과 대접이 필요한 어르신들은 그들만의 눈높이에 맞춘 '노년층 자조·여가 동아리'로 분화시키는 전략입니다. 어르신들만 모아두면 기술 습득이나 활동이 지속되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외부 강사에 의존하는 대신 미시적 역할 분담을 통해 그들만의 속도대로 나아가게 만들면 됩니다. 갈등을 두려워하여 억지로 묶어두는 결속은 잘못하면 파국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주민들의 욕구 변화를 경청하고 모임을 세련되게 갈라서 독립시키는 분화의 기술은 오히려 한 지역사회 안에서 다채로운 주민 조직들이 공존하며 상호작용하게 만드는 훌륭한 마중물이 됩니다.

양이 차야 질적 전환이 일어난다: 양질전화와 세대별 확산의 역동성

기관과 팀차원에서 주민조직화 사업운영시 놓치는 빈번한 실수는 기존 사업처럼 연역적으로 중장기 로드맵을 짜고, 현장을 로드맵에 맞추려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주민조직 사업은 중장기 로드맵을 짜되, 현장상황에 로드맵을 수정해나가는 방식 즉 연역과 귀납의 균형을 맞추는 방식으로 운영해야 합니다. 성급하게 미리 머리속으로 작성한 로드맵에 따라 년차별 '고도화'와 '질적 도약'을 추구하려한다면 주민들의 저항 또는 지침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철학적 명제 중에 '양이 차야 질이 변한다'는 양질전화(量質轉換)의 법칙이 있습니다. 물은 99.9도까지 아무리 끓어도 여전히 액체 상태인 물이지만 마지막 0.1도의 티핑 포인트를 만나는 순간 비로소 기체라는 질적 전환을 이뤄냅니다. 느슨한 주민조직의 일차적 성과는 '양적 확산'에 있습니다. 담당복지사는 하나의 주민모임을 자립시켜야 한다는 누군가가 얘기한 '원래'(는 없음)에 시달리기 보다 이 성공의 바이러스를 동네 전체로 퍼뜨려 1팀, 2팀, 3팀을 거쳐 10개의 동아리를 만들어내는 양적 확대를 선택하시길 권해드립니다. 만약 모임이 부흥하고 있다면 다세대 주택이 밀집한 골목이 복지관의 외부 환경이라면 거기에 맞추어 세대별 정체성을 가진 모임들로 분화시키는 세포분열 전략을 적용해보는 겁니다. 청년들의 트렌디한 의상디자인 모임, 젊은 엄마들의 육아를 위한 놀이개발 모임, 중장년층의 가죽공방 모임, 그리고 어르신들의 목공예 모임까지 세대별로 조직을 확대해 나가면 됩니다. 이 세대별 동아리들이 한자리에 모여 '주민조직 성과공유회'를 복지관의 축제처럼 운영하면 그 양적 규모 자체가 지역사회에서 가지는 실질적인 풀뿌리 세력이자 연대의 힘이 됩니다. 인간관계와 조직은 단기간에 고도화되지 않으며, 수많은 관계의 양이 축적되고 부딪히는 과정 속에서 양이 차면 어느 순간 질적인 성숙으로 급속히 전환하게 됩니다. 쑥과 마늘만을 먹고, 99일이 아니라 약속된 100일을 견딘 곰이 극적으로 인간이 되었다는  단군신화 이야기가 이를 나타내 줍니다. 느슨한 생활형 주민조직은 모임의 질적 심화보다 양적 확산이 먼저입니다. 

자립의 새로운 패러다임: 커브컷 효과와 자산기반 지역사회개발(ABCD)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주민조직의 '자립'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기 위해, 해외의 선진적인 모델과 이론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민조직화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미국의 사회학자 존 맥나이트(John McKnight)와 조디 크레츠만(Jody Kretzmann)이 정립한 '자산기반 지역사회개발(Asset-Based Community Development, ABCD)' 이론과 궤를 같이합니다. ABCD 이론은 지역사회의 결핍이나 문제점에 집중하기보다, 주민 개개인이 가진 재능, 자산, 그리고 관계망을 중심에 두고 지역을 변화시키는 방법론입니다. 주민은 복지 서비스의 수혜자가 아니라,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자산'이라는 관점입니다.한, 자립 단계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개념이 바로 '커브컷 효과(Curb-Cut Effect)'입니다. 원래 커브컷은 휠체어가 이동할 수 있도록 보도의 턱을 낮추어 깎아낸 것을 말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휠체어 이용자를 위해 보도블록의 턱을 깎았더니, 유모차를 끈 부모, 무거운 짐 수레를 끄는 배달원, 킥보드를 타는 아이들, 그리고 걸음이 서툰 어르신들까지 구역 내 모든 주민의 보행 환경이 획기적으로 편해졌다는 사실입니다.

자산기반 지역사회개발(ABCD)과 커브컷 효과의 현장 적용, 개념: 지역 내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 가장 문턱을 낮추었을 때, 공동체 전체가 혜택을 누리는 현상.

  • 해외 연구 및 실증 사례: 미국의 저명한 정책 연구가 안젤라 글로버 블랙웰(Angela Glover Blackwell)은 그의 논문 “The Curb-Cut Effect” (Stanford Social Innovation Review, 2017) 에서 사회적 약자를 위한 타깃 정책과 인프라 구축이 궁극적으로 사회 구성원 모두의 역량과 편의를 증진시킨다는 점을 실증적으로 증명했습니다.

 

주민조직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민조직이 지역 내 가장 소외된 약자들까지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모임의 문턱과 소통의 방식을 낮추었을 때, 그 모임은 단순한 취미 동아리를 넘어 동네 전체의 공동체성을 살려내고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거대한 사랑방으로 진화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복지관과 주민조직이 협력하여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플랫폼형 민관협치 모델입니다.

국내외 실천 사례가 보여주는 자산 기반과 분화의 힘

이러한 지향점이 단순히 서구의 이상적인 이론에만 머무는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국내외의 선전적인 실천 사례들이 존재합니다.

  • 해외 사례 - 미국 시애틀의 '이웃 자산 기금(Neighborhood Matching Fund)'과 주민 자조 조직: 미국 시애틀시 이웃부(Department of Neighborhoods)에서 수십 년간 운영해 온 이 제도는 지역의 결핍을 메우기 위해 외부 예산을 투입하는 기존의 방식을 거부했습니다. 주민들이 스스로 모임을 조직하고 자신들의 재능, 노동력, 혹은 사유 자산(자산기반 ABCD)을 매칭하여 프로젝트를 가져오면 시 정부가 재정을 지원하는 플랫폼형 구조입니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은 단순한 취미 모임에서 시작해 점차 마을의 공간 운영과 자치력 확보라는 질적 성숙을 이뤄냈으며, 시 정부는 플랫폼 공급자로서 주민의 자율권을 보장하는 자립의 패러다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출처: Seattle Department of Neighborhoods, Neighborhood Matching Fund Guidelines)

  • 국내 사례 - 광주 광산구 '주민주도형 골목 공동체'와 세대별 분화 실천: 국내의 대표적인 주민조직화 성공 사례인 광주 광산구의 한 복지관에서는 아파트 단지 내 주민들이 참여하는 바느질·공예 동아리를 운영하던 중 세대 간 갈등과 목적 전치 현상을 겪었습니다. 젊은 주부층과 노년층 주민들이 한 공간에서 부딪히며 소통의 문턱이 높아지자, 사회복지팀은 이를 억지로 묶어두는 대신 '세대별 욕구에 맞춘 동아리 분화' 전략을 취했습니다. 젊은 층은 경력단절 해소와 마을 의제 실천을 위한 조직으로, 노년층은 상호 돌봄과 여가를 위한 조직으로 분화시킨 뒤, 이들을 한 달에 한 번 대규모 '골목 장터'라는 양적 확산의 장에서 연대하게 만들었습니다. 주민의 속도에 맞춘 분화와 양적 결속이 어떻게 지역 전체의 공동체성을 살려내는지 증명한 모델입니다. (출처: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지역사회 주민주도형 복지공동체 활성화 방안 연구')

결과물의 완성도보다 과정 속 대화의 밀도

주민들이 지치거나 이탈할까 봐, 혹은 연말 성과 보고회에 낼 만한 그럴듯한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봐 조바심이 나는 것은 실무자로서 당연한 감정입니다. 하지만 주민조직화의 시행착오는 주민들의 역량 부족이라기 보다 복지관이 임의로 정해놓은 '연간 실적 달성 기한'이라는 틀과 실무자의 불안이 원인일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담당복지사들의 의도가 모임을 촉진하기 보다 지치게 할 수 있습니다. 주민조직을 담당하는 사회복지사들은 조직과 구성원들의 지속적 관찰이 가장 중요한 임무입니다. 개개인의 관찰과 더불어 조직의 역동을 주목하며, 때로는 막힌 흐름을 뚫어주고, 뚫기 어렵다면 우회로를 제안해보고, 속도가 빠르면 빠르다고 속삭여주고, 느리면 가속하라고 응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운전대를 잡지 않았기 때문에 내 의도대로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시행착오를 통해 운전대를 잡은 주민들은 사회복지사들과 공공사업을 운영하는 공직자들을 더욱 이해하는 기대하지 않은 성과를 얻게 됩니다. 오늘 주민들이 만든 성과물들이 조금 삐뚤어지고 어설프면 어떻습니까. 완성품의 퀄리티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그 제작 과정 속에서 "요즘 집에 무슨 일 있으십니까? 얼굴이 왜 이렇게 안 좋으세요?", "지난번에 아프다던 허리는 좀 어떠십니까?"라는 이웃 간의 진심 어린 돌봄과 위로의 문장이 오갔다면, 그날의 주민조직화 사업은 성공입니다. 사회복지사는 작품을 만드는 제조 공장의 감독관이 아니라, 주민들의 마음과 마음을 잇는 관계의 정원사이기 때문입니다.

성숙의 신호로서의 갈등을 기꺼이 환대하기

사업을 진행하다 보면 특정 주민에게 역할이 몰려 불만이 터져 나오거나, 헌신적이었던 방장이 "나 이제 힘들어서 강사 안 합니다!"라고 선언하는 위기의 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많은 복지사들이 이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사업의 실패를 직감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위기가 아닙니다. 비로소 주민들이 이 모임을 복지관의 프로그램이 아닌 '진짜 내 것'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건강한 성숙의 신호이자 풀뿌리 민주주의의 성장통입니다. 내 것이 아니면 불만도 없고 갈등도 생기지 않는 법입니다. 그때 담당 복지사가 중간에 서둘러 개입하여 교통정리를 해주거나 정답을 내려주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갈등과 정체의 순간을 기꺼이 환대하시기 바랍니다. 복지사는 한 걸음 물러서서 주민회의 테이블 위에 그 갈등의 문제를 날것 그대로 올려놓고, 주민들이 스스로 치열하게 토론하여 해결책을 찾을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고 지켜봐 주면 됩니다. 조금 느려도, 조금 거칠어도 주민들이 스스로 갈등을 분석하고, 전환하고, 대안을 만들어내는 그 생생한 경험을 통과할 때, 주민조직은 그 통과과정 자체의 경험이 민주적 시민을 형성하도록 하는 성과입니다. 주민조직 담당복지사는 주민들이 평범한 일을 연합하게 기차게 잘 해내도록 하는 것이 핵심 역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