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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칼럼[콩나물시루]

목소리 큰 사람에게 휘둘리는 회의는 그만 : 현장 활용 120% 신호등 토론 생존기

강정모 소장 2026. 6. 2. 15:59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회의, 길을 잃은 초보 복지사

"주민 여러분. 복지관 하반기 마을 축제 예산 배분 건과 관련해서,

작년처럼 전 주민 대상 먹거리 장터 중심으로 가자는 안건에 찬성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주시겠습니까?"

 

마을 복지 계획 수립과 동네 의사결정을 위한 주민 모임 현장, 입사 1.5년 차 박소통 사회복지사의 목소리가 회의실을 맴돌았습니다. 회의실에는 정적이 흘렀고, 주민들은 표정으로 서로의 눈치만 살필 뿐 누구 하나 손을 들지 못했습니다. 박소통 복지사는 긴장했습니다. 정적을 깬 사람은 발언권을 독점해 온 주민 대표 이주도 씨였습니다. "김 복지사, 다들 가만히 있는 거 보니까 내 말대로 하자는 거잖아. 하던 대로 먹거리 장터 크게 열어서 동네잔치 벌여야지, 뭘 또 투표를 하고 그래? 그냥 내 뜻대로 가입시다." 이 씨의 목소리에 다른 주민들은 고개를 숙이거나 먼 산을 바라보았습니다. 결국 이 씨의 의견대로 안건이 통과되는 듯했습니다.

 

갈등은 회의실 문을 나선 직후에 시작되었습니다. 회의가 끝난 후, 복지관 로비와 정자 나무 아래 모여 불만을 터뜨리는 주민들의 목소리가 박소통 복지사의 귀에 꽂혔습니다. "아까는 말 한마디 꺼내지도 못하게 하더니 자기들 멋대로 정하네.", "우리는 들러리야 뭐야? 애초에 답은 정해놓고 형식적으로 모이라고 한 거지?", "젊은 엄마들 의견이나 소외계층 이야기는 들으려고도 안 하잖아. 나 다음부터는 이 회의 안 나올래." 박소통 복지사는 좌절감이 들었습니다. 회의 시간에는 의견이 있으신 분은 자유롭게 말씀해 달라고 수차례 질문을 던졌고 기회를 주었는데, 주민들은 정작 그 자리에서는 침묵했습니다. 그리고 왜 뒤돌아서 불만을 제기하는 것일까요?

 

그는 주민조직화 역량에 의문을 느끼며, 복지관의 멘토이자 20년 차 베테랑인 김선배 사회복지사를 찾아가 고민을 토로했습니다"선배님, 주민분들은 왜 회의 시간엔 아무 말씀도 안 하시다가, 회의가 끝나고 나서야 뒤에서 불만을 제기하실까요? 제가 진행 능력이 부족해서 공론장을 망치고 있는 걸까요?" 김선배 복지사는 후배의 마음을 달래듯 미소를 지으며 차를 내어주었습니다. "소통 쌤, 그건 소통 쌤의 진행 잘못이 아니에요. 한국 사람들은 본인만 손을 들고 나머지 사람들이 손을 들지 않았을 때, 혼자만 주목받는 상황을 두려워하는 문화적 경향성이 있어요. 집단 안에서 다른 사람과 의견이 다를 때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을 회피하려는 성향이죠. 하지만 손을 들지 않았다고 해서, 그분들에게 자기 입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적절히 표현할 도구와 안전한 환경이 없었을 뿐이에요."

선배의 비급, 한국형 회의의 돌파구 '신호등 토론'

김선배는 캐비닛을 열더니 빨강, 노랑, 초록색으로 칠해진 A4 크기의 두꺼운 색상 카드 세트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습니다"이게 바로 침묵하는 다수의 입을 깨우고, 목소리 큰 몇몇 사람에게 회의 전체가 휘둘리지 않도록 막아주는 의사결정 기술, '신호등 토론' 카드예요. 소수만 발언을 주도하는 상황을 전환하고, 소극적이고 조용한 사람조차도 토론의 중심부로 끌어들이게 만드는 직관적인 방법이죠. 방식은 명확해요. 안건에 대해 찬성하면 녹색, 반대면 붉은색, 판단을 유보하거나 중립 혹은 제3의 대안을 고민 중이면 노란색 카드를 들어 자신의 입장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박소통 복지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카드를 만져보았습니다. "선배님, 색깔 종이 세 장 보여준다고 해서 주민들이 갑자기 입을 열까요? 찬반 투표랑 무엇이 다르죠?" "다릅니다, 소통 쌤. 손을 들어 자신의 입장을 드러냈을 때 집중되는 타인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이, 이 색깔 카드를 가슴 앞에 드는 순간 완화되는 심리적 효과가 있거든요. 말로 싸우기 전에 색깔 카드로 자신의 의사를 먼저 시각적으로 표명하기 때문에, 초기에 발생할 수 있는 언어적 충돌과 감정의 과열을 차단해 줍니다. 게다가 일반적인 회의에서 찬반에 대해 손을 들라고 하면 눈치만 보며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 사람이 많지만, 이 카드를 쥐여주면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카드를 들게 됩니다.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지는 거죠. 오히려 들지않게 되면 들지 않는 사람을 구성원들이 주목할 겁니다. 주목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적극적으로 입장을 표현해야하는 거죠. 한국적 상황에 아주 효과적인 도구인거죠^^. 모두가 일차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시각적으로 선언함으로써, 조용한 다수도 자연스럽게 공론장에 참여하게 되는 참여와 표현의 기술입니다."

빨강과 초록 사이, 노란색이 품은 민주주의의 비밀

박소통 복지사는 찬성과 반대의 역동은 이해가 갔지만, 가운데에 낀 노란색 카드의 존재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선배님, 그런데 굳이 중립이나 유보를 나타내는 노란색 카드가 필요한가요? 보통 회의나 행정에서는 찬성이냐 반대냐, 빠르게 결론을 내리고 다수결로 밀어붙이는 게 효율적이지 않습니까?" 김선배는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며 목소리를 낮췄습니다. "신호등 토론의 진정한 경이로움이자, 숙의 민주주의의 핵심 비밀은 바로 이 노란색 카드에 숨어있어요. 노란색은 단순한 무관심이 아니라 중립, 판단 유보, 혹은 조건부 수용이나 제3의 의견을 뜻합니다. 기존의 회의나 토론 방식은 사람들에게 찬성이냐 반대냐라는 양단간의 선택을 강요하죠. 그러면 사람들은 방어적으로 변하고 회의장은 순식간에 이분법적 싸움터가 됩니다. 하지만 중립이라는 독립된 제3의 입장을 인정받으면, 주민들은 우리 마을에 다양한 의견의 스펙트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존중하게 돼요. 안건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하거나 확신이 서지 않아도 중립이라는 이름으로 의사를 표시할 권리를 얻는 거죠." "아하, 무조건 양극단으로 나뉘어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막아주는 완충지대 역할을 하는군요?", "정확해요, 소통 쌤. 민주적 토론과 합의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찬반 양극단의 목소리가 아니라, 무엇이 보완되면 찬성할 것인가, 혹은 어떤 우려가 해소되면 반대를 철회할 것인가를 쥐고 있는 중립 지대의 목소리입니다. 신호등 토론은 이 노란색을 가시화하여 합의의 마중물로 삼는 역할을 하죠. 이 안건이 좋은가 싫은가라는 감정적 소모전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빨간색을 노란색으로, 노란색을 초록색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에 토론의 초점을 맞추게 함으로써, 소모적인 비난 대신 대안 중심의 토의로 국면을 전환시킵니다." 빨강과 초록 사이, 노란색이 품은 민주주의의 비밀에 대해 고민하던 박소통 복지사는 주민들에게 적용하기 전, 선배의 조언에 따라 복지관 내부의 갈등 이슈에 이 기법을 먼저 실험해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마침 복지관 내부에는 조직 운영의 방향성을 두고 직원 간의 대립이 이어지던 내부 갈등 이슈가 있었습니다.

복지관 내부의 실험: '출근 시간 1시간 조정안'을 둘러싼 직원의 갈등

갈등의 발단은 관장님과 중간 관리자들이 발의한 안건이었습니다. 하반기에 복지관 평가와 대규모 지역 복지 사업이 대거 몰려 전 직원의 업무 과부하가 예상되니, 사업이 집중되는 3개월 동안만이라도 공식 출근 시간을 현행 오전 9시에서 오전 8시로 1시간 당기고, 대신 오후 5시에 퇴근을 보장하자는 제안이었습니다이 안건이 전체 직원 회의에 상정되자, 복지관 내부 조직 분위기는 차갑게 얼어붙었습니다. 기존 방식대로 관장님이 "이 조정안에 찬성하시는 분 거수로 표결해 봅시다"라고 하자, 회의실 안은 정적과 진영 간의 눈치싸움으로 가득 찼습니다윗선 눈치를 보며 찬성 거수를 하려는 일부 고참 팀장들과, 뒤돌아서서 "어린 자녀 유치원 등교는 어쩌라는 거냐", "원거리 출퇴근자의 현실을 모르는 안이다", "오후 5시 퇴근이 사회복지 현장 구조상 보장되겠느냐, 결국 야근만 1시간 더 늘어나는 꼴"이라며 분노하는 평직원들 사이의 갈등이었습니다. 평소라면 관리자들의 압박에 주임급들이 침묵하고, 회의실을 나간 뒤 부서별로 뒷말과 갈등이 발생하여 조직 결속력이 무너질 위기였습니다이때 진행을 맡은 박소통 복지사가 용기를 내어 선배에게 전수받은 신호등 카드를 직원 전원의 테이블 위에 나누어 주었습니다"직원 여러분, 우리 조직의 운영 방안이니 눈치 보지 말고 솔직하게 가슴 앞에 신호등 카드를 들어 주십시오. 하반기 출근 시간 1시간 단축안에 대해 하나, 둘, 셋!" 결과는 사업 총괄과 행정 효율을 중시하는 팀장급들은 초록색(찬성) 카드를 들었습니다. 반면, 영유아를 양육 중인 주임들과 원거리 출퇴근자 등 실무 평직원들은 빨간색(반대) 카드를 치켜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노란색(중립·유보) 카드를 든 중간 연차의 선임 사회복지사들이 서 있었습니다박소통 복지사는 신호등 토론 매뉴얼에 따라 입장 모둠을 찬성(초록) 그룹과 반대(빨강) 그룹으로 구성하여 각각 별도의 회의실로 이동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뒷받침할 논거를 토의하도록 하였습니다. 초록 그룹 관리자들은 "하반기 외부 자원 배분 사업 서류 마감과 주민 방문이 오전 시간에 집중되는데, 9시 출근으로는 행정 대응이 늦다"는 논리를 다듬었습니다. 반면 빨강 그룹 실무자들은 "강제적인 8시 출근은 직무 스트레스를 가중시켜 복지 서비스 질을 떨어뜨린다"는 반대 논거를 수립했습니다그사이, 노란색 카드를 든 중립 직원들은 본부 회의실에 모여 객관적인 데이터를 기반으로 이슈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복지관의 지난 3년간 하반기 시간대별 업무량 통계 데이터, 유연근무제를 도입했던 이웃 복지관의 사례 보고서, 그리고 직원들의 실제 거주지 거리 분포도 등의 자료를 학습했습니다. 이들은 단순한 방관자가 아니라, 양 진영의 맹점을 파고들 준비를 마친 조직 내부의 '배심원단'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광명시민주시민교육센터에서 제작 및 주민들에게 배포한 신호등 토론 카드

 

1시간 후, 전 직원이 다시 모여 찬반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초록 그룹의 팀장이 "조직의 위기 극복을 위해 3개월만 희생하자"고 호소하자 , 빨강 그룹의 주임은 "희생을 당연시하는 조직 문화가 부작용을 낳는다"며 맞받았습니다. 토론을 지켜보던 '노란색 중립 배심원단'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조율에 나섰습니다"양측의 토론을 지켜보며 우리 중립 배심원단이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하반기 오전 업무 과부하는 전체 사업이 아닌 사례관리 및 지역복지 팀에 집중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따라서 전 직원을 일괄 8시 출근시키는 초록 안은 불합리하며, 그렇다고 대책 없이 현행을 유지하자는 빨강 안도 대안이 될 수 없습니다. 이에 우리 배심원단은 합리적인 토론을 전개한 실무자들의 논리를 인정하되, 오전 업무가 집중되는 특정 팀만 선택적 유연근무제를 적용하고, 나머지 팀은 현행대로 유지하되 업무 피크 타임에 인력을 상호 지원하는 제3의 대안을 판정안으로 제시합니다. 이 판정안을 바탕으로 다시 한번 카드를 들어주십시오." 중립 배심원단이 제시한 판정에 회의실 안의 공기가 변했습니다. 관장님과 부장조차 배심원단이 제시한 통계와 대안의 정당성에 고개를 끄덕였고, 반대를 외치던 실무자들도 "이 정도의 합리적 조정과 조건이라면 조직을 위해 수용하겠다"며 미소를 지었습니다다시 카드를 든 순간, 회의실은 초록색(대안 수용)으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목소리 큰 관리자의 독단 대신, 숙의를 통한 '민주적 의사결정'이 복지관 내부 조직 운영의 분위기를 전환했고, 신호등 토론의 효능성을 얻은 좋은 실험이기도 하였습니다.

베를린 자전거 도로와 서울 쓰레기 적환장에서 찾은 정당성

내부 직원 회의에서 신호등 토론의 갈등 해결 능력을 체험한 박소통 복지사는 주민 공론장에서도 이 기법이 통할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김선배는 후배의 확신에 힘을 보태며 주민 참여와 갈등 해결의 역사에 남은 국내외의 실제 성공 사례를 들려주기 시작했습니다"소통 쌤이 내부 갈등을 해결해 냈군요. 맞아요, 그 메커니즘은 대규모 지역사회 갈등에서도 똑같이 작동합니다. 독일 베를린 시와 일부 자치구의 사례를 볼까요?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친환경 자전거 도로를 대대적으로 확충하고 거주자 우선 주차 구역을 대폭 축소하려는 정책을 추진했을 때의 일이에요. 당연히 생계형 운전자들과 지역 상인들은 주차권을 침해한다며 반대했고, 시민 단체는 안전과 환경을 위해 자전거 도로를 넓혀야 한다며 대립했죠. 이때 지역 NPO와 주민의회가 공청회에 신호등 토론 방식을 도입했습니다. 주민들은 각 논점이 던져질 때마다 자신의 신호등 카드를 들었어요. 처음에는 빨간색과 초록색이 팽팽하게 대립하는 모습을 서로 눈으로 직접 확인하며, 이 문제가 단순한 이분법으로 해결될 수 없음을 인지했습니다. 촉진자는 노란색 카드를 든 주민들에게 어떤 조건이 충족되면 초록색으로 바뀔 수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지요. 그러자 노란색을 든 주민들이 인근 공공기관 주차장을 야간에 개방해 주거나, 조업 차량을 위한 임시 주차 공간이 확보된다면 찬성할 용의가 있다는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무조건적인 반대에서 벗어나 조건부 수용이라는 합의 지점을 찾아낸 사례죠.", "노란색 카드가 갈등을 해결하는 열쇠가 되었군요.", "그럼요. 국내 사례도 있습니다. 서울시 OO구에서 발생한 쓰레기 적환장 악취와 소음 문제로 인근 아파트 주민들의 민원의 압박이 높았던 주민총회 사례가 그래요. 주민들은 당장 전면 이전을 요구했으나, 구청은 대체 부지와 예산 문제로 즉각 이전은 불가능하며 현대화 시설 탑재가 현실적이라고 맞서며 갈등이 지속되었습니다. 주민자치회는 갈등을 조정하기 위해 대규모 주민 대토론회를 개최하고 신호등 토론을 전개했습니다. 1단계로 구청의 안을 던졌을 때 객석은 온통 반대의 빨간색 카드로 가득 찼어요. 하지만 촉진자가 숙의 과정을 리드하며 구청이 악취 모니터링 시스템을 주민들에게 실시간 공개하고, 5년 내 이전 계획을 명문화한다면 생각이 바뀌실 분이 있습니까라며 노란색의 가능성을 타진했습니다. 토론이 심화되면서 완강했던 빨간색 카드 중 일부가 노란색으로 바뀌기 시작했지요. 결국 주민 참여형 악취 감시단 구성과 5년 내 대체 부지 확정을 조건으로 하는 현대화 안이 압도적인 초록색 찬성을 얻어 통과되었습니다. 신호등을 통해 서로의 생각의 변화와 조건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며 도출한 결론이었기에 주민총회 이후 단 한 건의 소송이나 충돌 없이 사업이 착공되었습니다." 김선배는 역사적 교훈을 덧붙였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잘 아는 국책사업 갈등 사례들을 보세요. 제주 해군기지 건설이나 밀양 송전탑 갈등 사례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정부가 사업의 효율성을 앞세워 형식적인 주민 의견 수렴 절차만 거쳤을 뿐, 주민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해 의사를 표현하고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 실질적인 숙의나 공론장을 보장하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민주적 합의 절차의 결여는 결국 공동체의 붕괴와 갈등, 사회적 비용이라는 대가를 치르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신호등 토론과 같은 참여형 숙의 기법이 초기 의사결정 과정에 구조적으로 포함되었어야만 했어요. 사회복지 현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민을 단순한 동원의 객체로 보지 않고, 갈등 이슈를 공론화하여 주민 주도의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게 만드는 기술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해외 복지국가들의 나침반, 제도화된 색 카드 토론

김선배는 신호등 토론이 비단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선진 복지국가들에서는 이미 제도로 자리 잡았음을 문헌 자료를 펼치며 증명해 보였습니다"소통 쌤, 영국과 북유럽의 사례를 보면 우리 사회복지사들이 나아가야 할 길이 더 명확해져요. 영국의 경우, 지방정부가 노인 돌봄이나 장애인 지원, 정신건강 서비스 같은 지역 복지예산 배분을 조정할 때, 반드시 주민과 서비스 이용 당사자, 그리고 지역 NGO가 함께 참여하는 공청회와 워크숍을 개최하도록 법제화되어 있어요. 이 공론장의 핵심 도구가 바로 신호등 토론입니다. 예산 시나리오별로 주민들이 색 카드를 들어 선호와 우려를 드러내고, 그 숙의의 결과가 공식 보고서에 반영되어 예산을 최종 확정합니다. 예산 조정이라는 예민한 칼날 위에서도 당사자들의 민주적 동의를 얻어내는 시스템이죠.", "사회복지 예산 수립 과정 자체에 신호등 토론이 녹아들어 있군요.", "그렇죠. 복지 선진국이라 불리는 덴마크나 노르웨이 같은 북유럽 국가들은 전통적으로 협의와 숙의 문화가 강한데, 지역의 노인복지 서비스 모형을 선택할 때 이를 적극 활용합니다. 재가 중심 돌봄으로 개편할 것인가, 시설 중심 서비스를 강화할 것인가와 같은 정책 안을 두고, 지역 주민과 노인들이 참여하는 설명회에서 색 카드 토론을 벌입니다. 이를 통해 서비스 공급 모형의 설계 단계부터 주민들의 우려 사항을 시각화하고 보완책을 마련하죠. 미국에서도 홈리스 지원 시설이나 지역 정신건강센터를 설립할 때, 동네 주민들의 반발을 해결하기 위해 이 기법을 워크숍 과정으로 매뉴얼화해 사용하고 있어요. 신호등 토론은 전 세계가 검증한 숙의 민주주의의 기술입니다."

실전 투입, 마주 야기된 대립과 좌충우돌 시행착오

복지관 내부 회의에서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박소통 복지사는 복지관의 최대 난제인 '마을 유휴공간 및 공동체 공간 활용 방안 수립을 위한 주민 공론장'에 신호등 토론을 도입했습니다. 이번 의사결정 안건은 동네를 두 갈래로 쪼개놓은 갈등 이슈였습니다. 인근 유휴 부지에 청소년들을 위한 '청소년 북카페 및 문화공간'을 조성하자는 젊은 세대의 요구(초록)와, 동네 어르신들을 위한 '시니어 쉼터 및 건강 증진실'을 만들자는 노년 세대의 요구(빨강)가 맞부딪쳐 이미 자치위원회는 수개월째 마비 상태였습니다드디어 토론의 날, 주민 50여 명이 복지관 강당을 가득 채웠습니다. 각 책상 위에는 박소통 복지사가 만든 빨강, 노랑, 초록색 신호등 카드가 놓여 있었습니다. 박소통 복지사는 마이크를 잡고 첫 발언을 시작했습니다. 본 토론에 들어가기 전, 주민들의 긴장과 경직된 분위기를 완화하기 위해 복지관 내부 회의 때처럼 워밍업 게임을 제안했습니다. "주민 여러분, 본격적인 토론에 앞서 손에 쥐고 계신 무지개 색깔 카드로 옆 사람과 가위바위보 카드 따기 게임을 진행해 보겠습니다!" 다행히 강당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지며 어색했던 공기가 부드럽게 풀렸습니다. "자, 분위기가 무르익었으니 오늘 우리 마을의 운명을 결정할 안건을 상정하겠습니다. 유휴공간 활용 방안에 대해, 각자 준비되신 신호등 카드를 가슴 높이로 일제히 들어주십시오! 하나, 둘, 셋!" 주민들이 일제히 카드를 치켜들었습니다. 예상대로 강당은 양쪽으로 갈라졌습니다. 중고등학생 자녀를 둔 젊은 부모들과 청년들은 일제히 초록색 카드를 높이 들었고 , 노인회와 어르신들은 빨간색 카드를 들어 올리며 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주민들은 대립하는 색깔의 숲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며, 이 갈등이 결코 누군가 한 명의 고집으로 끝날 문제가 아님을 인지하는 듯했습니다그런데 그 순간, 박소통 복지사의 눈에 뜻밖의 광경이 들어왔습니다. 거대한 초록과 빨강의 장벽 사이에, 조용히 노란색 중립 카드를 들고 있는 주민 10여 명이 강당 곳곳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찬성과 반대 어느 쪽에도 서지 않은 이 노란색 카드의 주인공들이야말로 오늘 토론의 향방을 가를 인물들이었습니다.

배심원이 된 노란색, 숙의와 공부를 하다

여기서 박소통 복지사는 복지관 직원 회의에서 성공을 거두었던 전략적 매뉴얼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입장에 따라 주민들을 회의실 안에서 분리하여 별도의 소그룹 모임을 결성하도록 촉진한 것입니다"주민 여러분, 지금부터 각자의 카드가 가진 논리를 더 다듬기 위해 그룹별 모임을 갖겠습니다. 초록색 카드를 드신 분들은 찬성 그룹으로, 빨간색 카드를 드신 분들은 반대 그룹으로 모여 왜 우리가 이 공간을 확보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논거와 타당한 이유를 토의해 주십시오. 그리고 노란색 카드를 드신 주민 여러분은 이 자리에 남아 중립 배심원단 모임을 결성하겠습니다." 의사결정의 주도권이 바뀐 순간이었습니다. 찬성과 반대 그룹은 각각 분주하게 모여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할 논거를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반면, 노란색을 든 중립 그룹은 박소통 복지사의 리드 하에 특별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들은 어느 한쪽의 주장에 휩쓸리기 전, 마을의 전체 예산 구조, 유휴 부지의 법적 제약, 우리 동네의 인구 통계학적 변화 추이 등 객관적인 데이터와 팩트 자료와 AI를 활용하여 학습과 토론을 시작했습니. 단순한 방관자가 아니라, 합리적인 판결을 내리기 위해 사안을 입체적으로 학습하는 숙의 평의원회로 거듭난 것입니다"우리가 무조건 중간에서 눈치만 보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마을 데이터를 직접 보면서 공부를 하니까 양쪽 주장의 맹점이 뭔지, 진짜 동네에 필요한 게 뭔지 눈에 보이기 시작하네." 노란색 그룹의 주민 복지 위원 한 분이 말했습니다. 소그룹 토의와 학습이 끝난 후, 강당 중앙에서 본격적인 찬반 대토론회가 진행되었습니다. 찬성 측 대표는 "마을에 아이들이 쉴 곳이 없어 PC방이나 유흥가를 배회한다"며 호소를 펼쳤고 , 반대 측 대표는 "평생을 이 동네에 헌신한 노인들이 갈 곳이 없어 길거리를 헤매는 현실을 외면하느냐"며 맞섰습니다. 상호작용이 촉진되면서 질문과 반론, 보완 설명이 오갔습니다그리고 이 모든 공방을 무대 중심에서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객석 중앙에 자리 잡은 노란색 카드의 '중립 배심원단'이었습니다. 이들은 미리 공부한 객석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어느 쪽의 주장이 감정에만 호소하는지, 어느 쪽의 논거가 진정으로 마을 전체의 공익과 합리성에 부합하는지 따져보며 배심원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생각이 바뀌는 것을 환영합니다, 대안과 승복

양측의 최종 발언이 끝나고, 강당에는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박소통 복지사는 다시 한번 단상 앞으로 나아가 주민들을 향해 인사한 후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주민 여러분, 긴 시간 서로의 우려와 이유를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 토론을 통해 정답을 찾아 누군가를 이기려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의 다른 생각이 왜 존재하는지 그 깊은 속내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찬반 토론을 지켜보신 노란색 중립 배심원단 여러분의 판정이 있겠습니다. 양측의 토론 중 가장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며, 우리 마을 전체의 상생을 위한 대안을 제시한 쪽이 어디인지 판단하셔서 최종 카드를 들어주십시오. 아울러 찬반 그룹의 주민 여러분도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내 생각과 입장에 변화가 생기셨다면, 주저하지 말고 스스로를 점검하여 새로운 색깔의 카드를 들어주십시오. 하나, 둘, 셋!" 다시 한번 일제히 카드가 올라간 변화된 양상이 펼쳐졌습니다. 완강하게 빨간색 카드를 고수하던 어르신들 중 몇 분이 노란색 카드로 입장을 바꾸었고 , 초록색 카드를 들고 있던 청년들 중 일부도 노란색 카드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객석 중심의 노란색 중립 배심원단이 일제히 카드를 들어 올리며 판정을 시각화했습니다노란색 배심원단의 대변인이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우리가 양쪽 이야기를 다 듣고 동네 데이터도 공부해 보니, 두 공간 모두 우리 마을에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한쪽의 손만 들어줄 수 없습니다. 대신, 토론 과정에서 찬성 측이 제안한 공간의 가변적 활용과 반대 측의 안전한 접근성 보장을 합쳐서, 건물을 복층으로 설계하되 1층은 어르신들의 쉼터로, 2층은 청소년들의 스터디 카페로 조성하는 대안적 안을 제안합니다. 이에 동의하시는 분들은 모두 초록색 카드를 들어주십시오!" 배심원단의 대안 제시와 판정에, 처음의 의견을 고수하기 보다 숙의 과정을 통해 스스로 판단을 수정하는 민주주의적 승복의 경험이 현장에서 재현된 것입니다. 자신의 목소리가 묵살되거나 패배한 것이 아니라, 정당한 조건과 대안으로 수용되는 과정을 목격한 노인회장 이주도 씨도 대안에 찬성했습니다. 합의가 된 것입니다.

갈등을 넘어 연대로, 주민조직화 효과적 기술

주민총회를 마친 후, 퇴근길에 나선 박소통 복지사의 얼굴에는 미소와 울림이 번졌습니다. 과거 회의가 끝난 후 복지관 뒤편에서 웅성거리며 불만을 토로하던 주민들의 모습은 볼 수 없었고, 오히려 어르신들과 청소년 엄마들이 손을 맞잡고 "우리 1층이랑 2층 인테리어는 어떻게 꾸밀지 다음 주에 또 모여서 얘기하자"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신호등 토론은 단순한 회의 촉진 기법이나 재미를 위한 유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한국 사회 특유의 침묵하던 소극적인 다수를 공론장의 주체로 이끌어내고 , 결과보다 각자가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이유와 논리의 숙의 과정을 듣는 것을 중시하는 민주주의의 효과적 기술이었습니다지역조직화, 마을복지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는 우리 사회복지사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역량은, 위에서 아래로 완벽한 정답이나 사업 계획서를 제시하는 관료적 능력이 아닙니다. 주민 스스로 공동체의 갈등을 안전하게 시각화하고 , 노란색이라는 완충지대 속에서 공부하며 대안을 찾고 , 타인의 논리에 귀 기울이며 내 생각이 바뀌는 것을 환영하며 , 숙의 끝에 나온 결과에 승복하는 성숙한 문화를 촉진해 주는 촉진자(Facilitator)의 역할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