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일의 헌신이 남긴 위대한 이정표
주민자치법제화전국네트워크의 전(前) 사무총장 송문식입니다. '전(前)'이라는 두 글자에는 개인이 직책을 내려놓았다는 의미와 함께, 조직이 스스로의 사명을 완수하고 역사 속으로 명예롭게 걸어 들어갔다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다행히도 저의 경우는 후자에 해당합니다. 주민자치법제화전국네트워크는 설립 당시 품었던 위대한 목표를 달성하였으며, 그 결과 조직의 자발적 해산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 호칭을 아쉬움보다는 깊은 감사와 영광스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지난 5년은 주민자치법제화라는 단 하나의 목표만을 바라보며 중단 없이 달려온 시간이었습니다. 길게는 1,500일이 넘는 대장정이었습니다. 그 과정 속에는 뜨거운 기대와 가슴 아픈 좌절이 공존하였습니다. 법안 통과를 눈앞에 두고 무산되는 정국의 소용돌이도 겪었으며, 다시 처음부터 주춧돌을 놓아야 했던 고단한 시간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 각지에서 주민자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수많은 활동가와 주민들께서는 결코 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 치열했던 기록을 언젠가는 반드시 사회적 자산으로 남겨야겠다고 다짐해 왔습니다. 법제화라는 최종 결과물뿐만 아니라, 그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흘린 현장의 땀방울과 과정 자체가 우리 민주주의의 소중한 유산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경기도마을공동체센터가 이토록 소중한 지면을 허락해 주신 것은 개인적으로도 매우 뜻깊고 감사한 일입니다. 이 글은 단순한 활동 보고서가 아닙니다. 주민자치법제화전국네트워크가 걸어온 길을 정직하게 기록하는 동시에, 이제 새로운 출발선에 선 주민자치회가 향후 나아가야 할 좌표를 함께 모색하고자 하는 제언입니다.

삭제된 주민 권리, 행동의 불꽃이 되다
지금도 2020년 12월의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32년 만에 지방자치법 전부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는 낭보는 지방자치 현장에 거대한 희망을 안겨주었습니다. 오랜 세월 논의되어 온 지방자치 제도의 패러다임 혁신이 마침내 결실을 맺는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벅찬 기대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통과된 법안의 실체를 확인한 현장 활동가들은 일제히 큰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여야가 장기간 공들여 논의했던 주민자치회 관련 조항이 최종안에서 통째로 누락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지방자치의 핵심이자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주민자치회의 법적 설치 근거가 완전히 삭제된 채로 개정안이 가결된 것입니다. 당시에 현장에서는 주민자치회 설치 근거의 포함을 지극히 당연한 순리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주민자치회는 이미 단순한 시범사업의 단계를 넘어 전국적인 대세로 확산되고 있었으며, 법적 기반 마련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과제였습니다. 그러나 냉혹한 정치적 현실은 우리의 예측과 전혀 달랐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깊은 실망감에 빠져들었을 때, 도리어 행동을 결심한 리더들이 있었습니다. 거꾸로 흐르는 지방자치법의 조항을 다시 복원하기 위하여 비상대책위원회, 직접민주주의마을공화국, 전국민회준비위원회 등에서 헌신하던 10여 명의 활동가들이 긴급하게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최초의 목적은 명료했습니다. 주민자치를 다시 법률 속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는 일념이었습니다. 이 작은 결심과 불꽃이 훗날 전국을 뒤흔든 법제화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이후 조직의 골격을 갖추기 위한 여덟 차례의 준비회의가 이어졌습니다. 운동의 방향성을 정립하고 창립 선언문을 다듬었으며, 전국의 활동가들을 결집하기 위한 연대 체계를 구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2021년 5월 31일, 대전에서 주민자치법제화전국네트워크의 창립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코로나19 팬데믹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습니다. 참석자 전원이 마스크를 착용한 채 행사를 치러야 했으나, 현장의 열기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타 올랐습니다. 온라인 유튜브 생중계를 통해 전국을 실시간으로 연결하였으며, 무려 2,068명의 시민과 98개에 달하는 단체가 주민자치법제화의 기치 아래 뜻을 모아주셨습니다. 그날의 연대를 통해 우리는 주민자치가 특정 지역이나 소수 활동가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가 함께 완성해야 할 풀뿌리 민주주의의 과제임을 천명하였습니다.
낙관적 희망을 넘어 진흙탕을 걷다
창립 과정 속에서 지금도 가슴 깊이 남아있는 명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조직의 정관을 제정하던 회의 당시, 우리 조직의 해산 시점을 언제로 명시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누군가는 법제화가 최종 완성될 때까지 조직을 존속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또 다른 누군가는 목적이 명확한 단기 상설 조직인 만큼 종료 시점 역시 배수진을 치듯 명확히 해야 한다고 제안하였습니다. 장시간의 토론 끝에 참석자 전원은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2021년 안에는 반드시 주민자치법이 제정될 것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낙관론이라기보다는, 현장의 열망이 만들어낸 절박한 희망에 가까웠습니다. 그리하여 정관의 해산 예정일 칸에는 '2021년 12월 31일'이라는 날짜가 선명하게 새겨졌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으로 순진했던 예상방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는 그 어느 누구도 이 여정이 5년 가깝게 이어지는 장기전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 해산 예정일 조항은 매년 개최되는 정기총회 때마다 단골 수정 대상이 되어 연장되는 운명을 맞이하였습니다. 처음에는 1년씩 연장되다가, 나중에는 법제화가 최종적으로 성취될 때까지로 정관 자체를 전면 개정해야만 했습니다. 한때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결정했던 정관의 한 줄이, 역설적으로 우리 법제화 운동이 마주했던 엄혹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증명하는 역사적 기록물로 남게 되었습니다.
재난을 뚫고 타오른 연대의 연대
우리 네트워크는 창립선언문을 통해 세 가지를 약속하였습니다. 첫째는 주민이 스스로 지역을 통치하는 주민자치의 실질적 주체로 우뚝 서는 것이며, 둘째는 전국 1만 명 주민의 염원을 결집하여 주민자치법을 국가적 공론장으로 이끌어내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셋째는 전국 17개 시·도 전역에 공론장을 전면 개설하고 개방형 주민자치 네트워크를 촘촘하게 구축하는 과제였습니다. 지나온 발자취를 돌아보건대, 그 선언문은 단순한 정치적 수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후 5개년 동안 우리가 현장에서 온몸으로 밀고 나가야 했던 구체적인 행동지침이자 약속이었습니다. 조직 창립 직후 우리 앞을 가로막은 가장 거대한 벽은 코로나19라는 전 지구적 재난이었습니다. 집합 자체가 금지되었고, 전국의 지역을 순회하며 대면 토론회를 개최하는 일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주민자치라는 가치 본연이 '사람과 사람의 대면을 통한 연결'에 기반하는 것인데, 가장 기초적인 만남조차 차단되는 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위기는 언제나 역설적인 돌파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코로나는 우리에게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새로운 소통 문화를 선사하였습니다. 화상회의 플랫폼과 실시간 라이브 스트리밍을 활용한 온라인 공론장이 전국 도처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전국의 활동가들이 물리적 공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주제를 두고 밀도 높은 토론을 전개하는 선진적 문화가 확산되었습니다. 서울을 기점으로 삼아 제주에 이르기까지 각 시·도별 지역 공론장이 중단 없이 이어졌으며, 전국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와 공동으로 주관하는 메이저 토론회도 성공적으로 개최해 냈습니다. 또한 활동가들의 정무적·정책적 역량을 극대화하기 위한 법제화 캠프와 입법 정책 토론회 역시 쉼 없이 가동되었습니다. 제도권 국회 내부에서의 움직임도 가속화되었습니다.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의원들과 함께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주도하였고, 입법 토론회를 정기적으로 상설화하며 법제화의 시급성을 끊임없이 쟁점화하였습니다. 이름 없는 수많은 이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하였습니다. 누군가는 밤을 새워 입법 논리 자료집을 집필하였고, 누군가는 국회의원실의 문턱이 닳도록 보좌진을 설득하였으며, 또 다른 이들은 엄동설한의 날씨 속에서도 지역의 골목을 누비며 주민들의 연대 서명을 받아내었습니다. 이러한 눈물겨운 여정들은 메이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하였지만, 전국 곳곳에서 조용하고도 끈질기게 전개되었습니다. 그 인고의 시간들이야말로 주민자치법제화 운동이 일방적인 단체 운동을 넘어, 진정한 주권자 중심의 시민운동으로 전면 체질 개선을 이뤄낸 위대한 성장의 과정이었습니다.
정치가 외면한 입법의 문턱에서
2023년의 해가 떠오르면서 법제화에 대한 우리 내부의 기대감은 정점에 달하였습니다. 특히 제21대 국회의 임기가 최종 종료되기 전에는 반드시 주민자치법이 본회의의 문턱을 넘어설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행정안전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한 여야의 핵심 의원들 역시 법안 통과에 대하여 극히 전향적이고 긍정적인 입장을 표명해 주었으며, 실무적인 조문 조율과 심의 역시 상당 부분 진척을 이룬 상태였습니다. 수년간 흘려온 눈물과 노력이 마침내 위대한 법률 제정이라는 역사적 결실로 귀결되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냉혹한 정치의 시간표는 현장의 간절한 염원과는 전혀 다른 궤적으로 흘러갔습니다. 정쟁으로 얼룩진 국회는 끝내 민생 법안의 우선순위 속에서 주민자치법을 처리하지 못하였고, 제21대 국회의 임기 만료와 동시에 우리가 온 힘을 다해 밀어 올렸던 법안은 전량 자동 폐기라는 비극을 맞이하였습니다.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자구 하나하나를 다듬었던 입법안이 단 한 번의 본회의 표결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유실되는 장면을 지켜보는 일은 참담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날 국회 의사당 문을 나서던 수많은 활동가들은 밀려오는 허탈감과 슬픔을 감추지 못하였습니다. 다시 처음부터 이 거대한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그 절망의 목소리는 결코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대한민국 입법 구조상 국회 임기가 종료되어 법안이 폐기되면, 새롭게 개원하는 국회에서 모든 정식 입법 절차를 기초부터 다시 밟아 나가야만 합니다. 우리가 쌓아 올렸던 위대한 시간과 공청회의 노력들이 단숨에 영(0)의 상태인 출발선으로 강제 리셋된 것입니다.
정책의 후퇴와 현장의 혼란
돌이켜보건대 우리 운동의 흐름을 뒤흔든 가장 결정적인 변수는 중앙 정치 권력의 지형 변화와 환경의 대전환이었습니다. 2022년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면서 중앙정부의 주민자치 정책 기조는 이전 정부의 흐름과 결을 달리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새 정부는 공식 국정과제를 선언하며 '주민자치의 법적 근거 마련 및 활성화 지원'을 천명하기는 하였으나, 현장의 활동가들이 피부로 체감할 수 있는 실질적인 정책적 변화는 미비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치 현장에는 거대한 혼란과 후퇴의 전조가 감돌았습니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대한민국 풀뿌리 자치의 가장 권위 있는 축제이자 교류의 장이었던 '전국주민자치박람회'가 전격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지역 간 우수 사례를 벤치마킹하고 상호 학습하던 연대의 플랫폼이 증발하였으며, 주민자치 활동을 전국적으로 인큐베이팅하던 생태계 자체가 위축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행정안전부가 각 지자체에 배포한 '제7차 주민자치회 표준조례안'은 현장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독소 조항들을 대거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기존 조례안들이 지향하던 주민자치회의 자율성과 독립적 권한을 대폭 축소하고 행정의 하부 통제 기구화하려는 경향성이 뚜렷하다는 비판이 학계와 현장 전반에서 쏟아졌습니다. 이에 발맞추어 일부 보수적인 지방자치단체에서는 기존의 주민자치회 체계를 과거의 관변 단체 성격이 짙은 '주민자치위원회' 체제로 역행시켜 전환하는 유감스러운 사례들까지 속출하였습니다. 현장에서 온몸을 바쳐 자치의 역사를 일구어온 이들의 관점에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퇴행이자 깊은 우려를 자아내는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꺾이지 않는 마음들이 지켜낸 불씨
모든 위대한 사회운동의 역사에는 거대한 상승기와 고통스러운 정체기가 교차하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주민자치법제화 운동 역시 예외 없이 이 법칙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2023년과 2024년은 외부적인 정권 기조의 변화라는 거센 역풍과 내부적인 장기 투쟁에 따른 동력 저하가 동시에 엄습한 잔인한 시기였습니다. 최전선에서 활동해 온 동지들의 육체적·정신적 피로감 역시 한계치에 다다라 있었습니다. 도대체 언제쯤 법안이 제정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실체 없는 막막함은 활동가들의 영혼을 잠식하는 가장 무서운 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엄혹해질수록 우리는 오히려 서로의 손을 더 단단히 맞잡고 더 자주 만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우리는 세종시의 작은 회의실에 정기적으로 집결하여 자치의 본질을 학습하였고, 각 지역 현장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투명하게 공유하며 무뎌진 혁신의 의지를 날카롭게 갈았습니다. 여야를 막론하고 국회의원들과의 릴레이 면담을 단 하루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국회 내 공론장의 포럼을 상설화하고 입법의 타당성을 객관적 데이터로 설명해 내며, 주민자치라는 거대한 의제가 여의도 정치권의 관심 밖으로 영구 도태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역사적인 법제화 운동은 화려한 미디어 이벤트나 구호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진심 어린 설득, 수백 번에 걸쳐 반복되는 지루한 실무 회의, 산더미 같은 법률 검토 자료집의 분석, 그리고 무엇이 와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인간에 대한 신뢰가 결착되어 마침내 역사의 수레바퀴를 전진시킵니다. 지금 와서 복기해 보건대, 그 정체기는 성과가 부재했던 암흑기가 아니라 거대한 전환점을 향해 에너지를 응축하던 위대한 인고의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비록 당장의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는 못하였으나, 운동의 꺼지지 않는 불씨만큼은 현장의 심장 속에 사수해 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귀한 불씨는 마침내 도래할 새로운 정치적 전환기와 결합하여 거대하게 폭발할 준비를 마쳐가고 있었습니다.
정권의 심장부에서 법안을 밀어 올리다
2024년 4월 10일,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가늠자가 될 제22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일제히 치러졌습니다. 선거 결과는 여의도 정치권의 지형과 역학 관계를 완전히 재편해 놓았습니다. 오랜 시간 어둠 속에서 법제화 운동을 지속해 오던 우리 네트워크에도 마침내 새로운 돌파구와 강력한 기회의 창이 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고무적이었던 사실은, 과거 현장과 학계에서 주민자치의 당위성을 함께 외치고 깊이 공감해 주었던 다수의 개혁 성향 의원들이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의 핵심 멤버로 대거 진입하게 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우리는 지체 없이 정무적 실행에 돌입하였습니다. 제21대에 이어 제22대 국회에서도 행정안전위원회 위원으로 맹활약하던 이해식 의원을 비롯하여, 주민자치의 핵심 가치를 공유하는 여야 의원들과 연쇄적인 심층 연대 면담을 전개하였습니다. 이는 단순히 입법을 앙망하는 수준의 구태의연한 청원이 아니었습니다. 주민자치회가 왜 지금 이 시점의 대한민국에 절대적으로 필요한지, 소멸해 가는 지역 현장에서 어떠한 대안적 공동체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 그리고 법적 기반이 부재할 때 발생하는 행정적 한계와 현장의 예산 낭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정밀한 데이터와 논리로 하나하나 설득해 냈습니다. 오랫동안 축적해 온 진심과 정교한 설득은 마침내 견고했던 국회의 벽을 조금씩 허물어뜨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위기의 순간, 주권자의 이름으로 결집하다
그러나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는 언제나 인간의 정교한 설계대로만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2024년 연말, 대한민국 정국은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전대미문의 거대한 정치적 대격변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12·3 비상계엄 사태'라는 헌정사적 위기는 대한민국 사회 전체의 시스템을 일시에 마비시켰으며, 여의도 정치권의 모든 정무적 기능과 관심은 국가적 헌정 위기 대응과 시국 수습이라는 블랙홀 속으로 전량 흡수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주민자치법제화 의제 역시 국가적 비상사태 속에서 다시금 입법 우선순위의 저 멀리 밖으로 밀려나는 비운을 맞이하였습니다. 법률 제정의 거시적 정당성과 현장의 필요성이 퇴색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국회의 시계는 언제나 거대한 시국 현안과 중앙 정치권의 소용돌이에 연동되어 움직일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수년의 세월을 인내하며 오직 이 순간만을 기다려온 현장의 활동가들에게 또다시 기약 없는 잔인한 기다림의 시간이 시작된 것입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그 순간만큼은 가슴이 터질 듯한 답답함과 무력감이 밀려왔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법률이라는 명문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회의적 질문을 스스로에게 수없이 던졌습니다. 그러나 암흑이 깊어질수록 도리어 한 가지 사실만은 더욱 명징해졌습니다. 정치가 혼란할수록 누군가는 주권자의 이름으로 이 자치의 의제를 끝까지 놓지 않고 사수해야만 한다는 엄중한 사명감이었습니다.
여의도 광장을 채운 풀뿌리의 외침
그 혼란의 무렵, 우리 네트워크의 내부 단체방과 회의실에서는 현실 타개를 위한 격렬한 노선 전환의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국회의 처분만을 바라보는 수동적 입법 운동의 시기는 끝났으며, 법제화를 추동하는 실질적인 힘은 오직 국민적 공감대와 광장의 강력한 여론으로부터 분출된다는 진리였습니다. 우리는 지체 없이 여의도를 떠나 다시 차가운 현장의 바닥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소멸해 가던 전국의 자치 동력들을 다시금 촘촘하게 링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눈물겨운 결집의 결과물이 바로 대한민국 자치 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2025 풀뿌리자치 전국주민행동'의 대폭발이었습니다. 전국 팔도에서 상경한 700여 명의 자치 주민과 현장 활동가들이 마침내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 집결하였습니다. 주민자치법제화의 조속한 타결과 마을공동체활성화기본법 제정을 강력히 촉구하기 위해, 제주에서, 강원에서, 전라와 경상의 오지에서 새벽 첫차와 버스를 나누어 타고 올라온 위대한 평범한 주권자들이 국회 앞 광장을 발 디딜 틈 없이 메워 나갔습니다. 그날 광장을 가득 채웠던 주권자들의 거대한 물결과 풍경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제 망막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저마다 살아온 지역도, 연령대도, 직업도 달랐으나 마을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마음 하나만은 단일대오였습니다. 주민이 지역의 진짜 주인이 되는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하자는 그 사자후는 단순한 구호의 나열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5년의 풍찬노숙 속에서도 끝내 자치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인간들이 뿜어내는 영혼의 선언이었습니다. 현장의 거대한 압박에 국회의장을 비롯한 여야 지도부 의원들이 광장으로 내려와 공식적인 지지 서약을 이행하였으며, 주민자치법제화는 마침내 정국의 최우선 핵심 의제로 전면 부상하였습니다. 그날의 투쟁은 일방적인 집회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운동의 야성이 다시금 완벽하게 살아 숨 쉬는 순간이었으며, 서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한 감격의 축제이자, "풀뿌리는 결코 죽지 않는다"는 위대한 증명 원년이었습니다.
엄동설한의 빙판 위를 지킨 1인 시위
거대한 대중 집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현장의 많은 이들은 비로소 입법의 최종 관문이 열릴 것이라 낙관하였습니다. 저 역시도 이번만큼은 국회가 준엄한 민심의 명령에 응답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득권 정치의 보수적인 문턱은 생각보다 훨씬 더 높고 견고하였습니다. 법안은 상임위 법안소위에서 지루한 자구 수정을 거듭하며 본회의 상정의 길목을 쉽게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우리는 최후의 배수진을 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이제는 국회의 문 앞을 우리의 몸으로 직접 지켜내겠다는 결단이었습니다. 2025년 11월 13일, 국회 행정안전위원장과의 전격적인 공동 기자회견을 엄수하며 조속한 법안 처리를 압박함과 동시에, 그날부로 국회 정문 앞에서의 무기한 연속 1인 시위에 돌입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단 며칠간의 강력한 정무적 퍼포먼스로 끝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여야의 대립으로 정국이 경색되면서 1인 시위는 끝이 보이지 않는 장기전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세찬 겨울비가 온몸을 적시는 날도 있었고, 칼바람이 몰아쳐 피켓을 든 손끝의 감각이 마비되는 날도 부지기수였습니다. 겨울이 깊어갈수록 여의도 국회 의사당 앞의 칼바람은 더욱 매섭고 혹독하게 아스팔트를 얼려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켓을 든 활동가들은 하루도 자리를 비우지 않고 교대로 빙판 위를 사수하였습니다. 지방의 현장 위원장님들께서는 이른 새벽 4시 첫차를 타고 상경하여 시위 대열에 합류하셨고, 직장인 활동가들은 생업을 마친 후 야간 시간을 쪼개어 국회 앞의 어둠을 지켰습니다. 그 눈물겨운 1인 시위는 단순한 시각적 시위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단 한 순간도 당신들을 감시하는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는 주권자의 엄중한 경고이자 존재 증명 그 자체였습니다.
기다림의 끝, 마침내 승리하다
2025년 11월 20일, 마침내 굳게 닫혀있던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의 문이 열리며 법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습니다. 연이어 수일 후에는 입법의 최종 게이트웨이라 불리는 법제사법위원회까지 전격 가결되었습니다. 현장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으며, 연내 본회의 최종 통과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우리에게 마지막까지 인내를 요구하였습니다. 법안 통과 직후 터져 나온 여야 간의 거시 예산안 파동과 대치 정국으로 인한 필리버스터의 발동 등 국회 메이저 일정들이 전면 마비되면서 본회의 상정은 기약 없이 순연되었고, 결국 2025년의 마지막 날까지 법안은 처리되지 못한 채 해를 넘기게 되었습니다. 눈앞에서 승리를 놓친 듯한 깊은 허탈감이 온몸을 휘감았습니다. 새해의 태양이 떠올랐으나 여의도의 경색 국면은 타개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2026년 1월, 우리 네트워크는 대전의 한 연수원에 모여 전사 워크숍을 개최하였습니다. 본래 이 자리는 법제화 완수를 자축하며 조직의 공식 해산 절차를 밟기 위해 수개월 전 기획된 시점의 모임이었습니다. 그러나 법안이 표류하는 상태에서 맞이한 회의장의 공기는 묘한 웃음과 서글픈 아쉬움이 교차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김칫국을 너무 빨리 마시고 해산 준비를 한 것 아닙니까?"라는 누군가의 자조 섞인 농담에 모두가 폭소를 터뜨렸으나, 그 웃음의 끝에는 쉽게 열리지 않는 입법 권력에 대한 씁쓸함이 짙게 배어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모인 그 누구도 투쟁을 포기하자는 나약한 소리를 내뱉지 않았습니다. 동지들의 눈빛은 오히려 더 단단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지방자치법 제17조의2, 역사가 되다
그리고 마침내,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약속의 그날이 우리 앞에 당도하였습니다. 2026년 3월 31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의 전광판에 압도적인 찬성 표결의 녹색 불빛이 일제히 점등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지방자치법 제17조의2. 주민자치회의 설치 근거와 지위를 법률로 명문화한 역사적인 조항이 마침내 국회 본회의를 최종 통과한 것입니다. 그 경이로운 승리의 속보를 스마트폰 화면으로 접한 순간, 제 뇌리를 스친 첫 감정은 놀랍게도 "우리가 마침내 해냈다"는 승리감이나 환희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지난 1,500일의 지옥 같은 여정 속에서 길바닥에 눈물을 뿌리며 함께했던 수많은 동지들의 얼굴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처음 골방에 모여 창립 선언문의 문구를 고민하던 창립 멤버들, 마스크를 쓴 채 전국의 온라인 중계차를 운전하던 전국의 간사들, 국회 앞의 칼바람 속에서 꽁꽁 얼어붙은 피켓을 손에서 놓지 못하던 이름 없는 활동가들, 지역 주민들의 비아냥을 견뎌내며 조례 개정 서명을 받아내던 주민자치위원님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단 한 줄도 남기지 않은 채 묵묵히 후원금을 보내주시며 배후에서 힘을 보태어 주신 수만 명의 위대한 시민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날의 승리는 특정 조직이나 개인의 영웅적 성취가 결코 아닙니다. 위대한 풀뿌리 공동체가 집단지성으로 행정 권력을 향해 투쟁하여 쟁취해 낸 공동의 승전보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법률 조문 한 줄을 추가한 것이 아닙니다. 주민이 자기가 살아가는 지역 공동체의 진짜 주권자로 우뚝 설 수 있다는 거대한 가능성을 대한민국 지방자치의 역사적 대지 위에 영구히 새겨 넣은 것입니다.
사람의 연대는 결코 해산하지 않는다
법제화의 완수와 동시에 주민자치법제화전국네트워크는 설립 당시 대국민 앞에 선언했던 본연의 역사적 목적을 100% 완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2026년 5월 2일, 우리는 눈물과 환희가 범벅이 된 공식 조직 해산식을 엄수하였습니다. 누군가는 평생의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한 미소를 지었고, 누군가는 정든 동지들과의 이별 앞에 뜨거운 눈물을 훔쳤습니다. 그러나 해산식장을 가득 채운 우리 모두의 심장은 완벽하게 동일한 미래를 향해 뛰고 있었습니다. 이제부터가 진짜 진짜 진검승부의 시작이라는 자각이었습니다. 법률이라는 제도적 그릇은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절체절명의 과제는 그 마른 법률 조문 속에 현장의 생명력을 불어넣어 살아 숨 쉬게 만드는 실천적 영역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공식적인 조직의 간판은 내렸으나, 5년간 피로 맺은 사람들의 자치 연대만큼은 결코 해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더욱 거대하고 진화된 형태의 포럼과 방식으로 현장에서 다시 조우할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가칭 '한국주민자치네트워크 2.0'의 출범 선언과 현재 전국 현장에서 뜨거운 반향을 일으키며 연일 개최되고 있는 대화모임 '주민자치 대나무숲'은 그 위대한 약속을 이행하기 위한 첫 번째 실천적 발걸음입니다. 법제화는 우리 운동의 종착역이 아니라, 위대한 주민자치 2.0 시대를 향해 나아가는 기초적인 출발선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법률을 어떻게 현장의 구체적 삶 속에서 실천해 낼 것인가, 풀뿌리 자치의 영토를 어떻게 더 넓고 깊게 확장할 것인가에 대한 또 다른 대항해의 닻을 올리고 있습니다.
법을 넘어, 사람의 시간으로
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오직 주민자치법제화라는 단 하나의 이정표만을 위해 전력질주하며 깨달은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법률의 제정은 우리 운동의 최종 목표가 아니라, 위대한 여정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라는 것입니다. 현장의 많은 이들이 법률만 제정되면 주민자치가 완성되고 마을의 모든 문제가 마법처럼 해결될 것이라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냉혹한 현장의 메커니즘은 결코 그렇게 작동하지 않습니다. 법은 단지 거친 황무지 위에 길을 내어줄 뿐이며, 그 거친 길을 걸어가며 위대한 역사를 창조하는 주체는 오직 사람입니다. 이번 지방자치법 개정안은 주민자치회라는 조직의 실체를 국가 기본법률에 최초로 명시했다는 측면에서 실로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동안 행정안전부의 시범사업이라는 불안정한 지위 아래 법적 근거도 없이 표류하던 주민자치회가, 이제는 대한민국 지방자치법이 공식 인정하는 상설 공공 제도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입니다. 비록 법안의 문구가 강제 조항이 아닌 "둘 수 있다"는 임의규정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 일말의 아쉬움은 남지만, 그 상징적 위상과 법적 파급력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이제 주민자치회는 지방정부나 단체장이 교체될 때마다 존폐를 걱정해야 하는 행정의 소모적 파트너가 아니라, 주민들이 스스로 마을의 현안을 심의하고 결정하는 공식적인 최고의 주민 대표 기구로 공인받게 되었습니다. 이 패러다임의 변화는 향후 현장에서 상당한 변화의 물결을 가져올 것입니다.
행사를 치르는 조직에서 미래를 설계하는 조직으로
지난 수십 년간 주민자치회 혹은 주민자치위원회는 동네의 단순한 문화강좌 프로그램을 관리하거나, 관공서의 동원성 행사를 보조하는 수준의 봉사단체 정도로 격하되어 인식되는 경향이 짙었습니다. 물론 그러한 활동 역시 이웃 간의 정을 나누고 지역 공동체의 파이를 키우는 소중한 밑거름이었음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법적 지위를 획득한 미래의 주민자치회는 과거의 낡은 껍질을 과감히 깨고 새로운 단계로 도약해야만 합니다. 이제 주민자치회는 우리 동네의 본질적인 결핍과 문제를 스스로 리서치하여 발굴하고, 다원화된 주민들의 갈등적 의견을 공론장을 통해 수렴하며, 행정 관료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실효성 있는 해결 방안을 도출해 내는 지역 거버넌스의 명실상부한 중심축이자 컨트롤 타워가 되어야 합니다. 동네 행사를 매끄럽게 치르는 기술자 조직이 아니라, 우리 마을의 10년, 20년 후의 거시적 미래를 설계하는 전략적 정책 조직으로 전환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혁신적 변화의 나침반은 최근 행정안전부가 전국의 지자체에 긴급 배포한 「제8차 주민자치회 참고조례 전부개정 안내서」의 조문 속에도 명확하게 투영되어 있습니다. 이번 개정 작업은 조례의 자구 몇 개를 수정하는 기술적 보완이 아닙니다. 주민자치회라는 주권자 조직의 존재 이유와 사회적 DNA 자체를 새롭게 정의하는 거대한 전환입니다.
자치의 양대 엔진, 주민총회와 자치계획
이번 참고조례 전부개정의 핵심 골자 중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지점은 바로 '주민총회'와 '자치계획'의 법적 위상과 강제성이 전례 없이 강력하게 강화되었다는 지점입니다. 새로운 가이드라인에 의거하여, 향후 전국의 주민자치회는 연 1회 이상의 주민총회를 무조건 의무적으로 개최하여야만 하며, 주민자치회 주도로 마을의 미래 청사진을 담은 종합적인 '자치계획'을 직접 수립하여 확정해야 합니다. 과거의 주민자치가 행정이 수립한 계획에 대하여 주민들이 사후에 단순 의견을 개진하는 요식행위에 머물렀다면, 이제부터는 주민이 직접 예산과 사업의 우선순위를 기획하고 확정하는 실질적인 '직접민주주의 기획자'의 단계로 진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민총회는 지루한 경과보고나 단체장이나 시군구의원들의 권면으로 채워지는 동네 행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동네의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현안을 두고 토론을 전개하며 자원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일상 속 '민주주의의 최고 학교'로 기능해야 합니다. 자치계획 역시 캐비닛 속에 사장되는 형식적인 문서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주민들이 동네를 조사하고, 소외계층의 목소리를 경청하여 수립한 실행 가능한 의제여야 하며, 이는 지방정부의 주민참여예산 및 본예산 편성 시스템과 연결되는 실질적 기능을 해야합니다. 주민자치회의 진짜 실력과 권위는 주민총회와 마을계획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판가름 날 것입니다.
봉사단체를 넘어 공공 리더십 조직으로
제도적 그릇과 법률이 정비되었다고 해서 현장의 주민자치가 자동으로 고도화되는 낙관적 미래는 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혹독한 시험대는 지금부터 시작됩니다. 미래의 주민자치회는 단순한 동네 청소나 김장 봉사 같은 일차적인 봉사단체의 마인드만으로는 자치의 흐름을 리드할 수 없습니다. 이제 현장의 리더들에게는 우리 동네의 인구 통계와 슬럼화 문제를 분석해 내고,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공공정책 지표를 해석하고 활용하는 정책적 문해력, 다양한 이해관계로 얽힌 주민들 간의 갈등을 민주적 퍼실리테이션 기법으로 조정해 내는 갈등 관리 역량, 그리고 공공 예산 사업을 기획하고 집행하는 사업 실행력과 성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해 내는 회계적 투명성까지 요구됩니다. 결국 주민자치회 자체가 전문성을 갖춘 하나의 강력한 '공공 리더십 조직'으로 체질 개혁을 해야하는 현실입니다. 물론 이러한 역량의 도약이 하루아침에 기적처럼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현장의 끊임없는 '지속 가능한 자치 교육과 상설 학습 체계의 구축'입니다. 주민자치는 민주주의라는 유산을 온몸으로 학습하는 평생 교육의 과정이며, 주민자치회는 그 학습의 에너지가 매일같이 뿜어져 나오는 우리 삶에서 가까운 동네 학교가 되어야만 합니다.
지자체의 인식 전환, 시혜에서 파트너십으로
주민자치회 내부의 치열한 혁신과 변화만으로는 절반의 성공에 그칠 수밖에 없습니다.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행정 관료 조직의 패러다임 역시 변화되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여전히 일부 지방자치단체의 공직 사회나 단체장은 여야를 막론하고 주민자치회를 행정 편의주의적 발상에 따라 읍·면·동사무소의 업무를 보조하거나 민원을 무마해 주는 하부 협조 기구 정도로 인식하는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법제화가 완료된 오늘날의 자치 시대에는 이러한 관료적 인식을 바꿔야 합니다. 주민자치회는 행정 기관의 하위 조직이나 관변 단체가 아닙니다. 지역의 본질적 난제들을 머리를 맞대고 함께 해결해 나가는 동등한 자격의 '정책 파트너'이며, 제도권 밖 주권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제도 공론장 내부로 연결해 주는 공식적인 '협치 주체'입니다. 지방정부는 자치단체가 독점하고 있는 핵심 정책 정보와 예산 집행 현황을 주민자치회에게 투명하게 공개해야 하며, 주민들이 총회를 통해 도출해 낸 자치계획이 본예산과 정책으로 100% 연동될 수 있도록 행정적·제도적 인프라를 지원해야 합니다. 과거 행정 권력이 권한과 정보를 독점하고 시혜적으로 배분하던 관치 시대를 종식하고, 주민과 함께 권한을 나누고 책임 역시 공동으로 짊어지는 진정한 '대등한 협치 시대'로 전면 이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초연결 시대, 협치가 곧 지역의 생존 전략이다
오늘날 우리 지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사회적 재난과 난제들은 갈수록 복잡다단해지며 악화되고 있습니다. 초고령화와 지방 소멸의 공포, 돌봄 공백과 복지 사각지대의 발생, 기후 위기에 따른 지역 재난, 공동체 해체와 고독사 문제, 그리고 청년 인구의 급격한 유출 등은 이제 그 어떤 유능한 지방정부의 관료 조직이나 예산만으로도 단독 해결이 불가능한 영역입니다. 그렇다고 주민자치회라는 민간 조직 혼자만의 열정으로 해결할 수 있는 과제도 아닙니다. 앞으로 다가올 주민자치회는 자신의 조직 이기주의를 과감히 타파하고, 동네의 통·리 조직, 지역사회보장협의체, 초·중·고등학교, 사회복지관, 마을기업과 협동조합 등 사회적경제 조직, 그리고 풀뿌리 시민단체와 종교 단체에 이르기까지 지역 내에 존재하는 모든 주체들을 자치라는 하나의 유기체로 엮어내는 '거대한 지역 거버넌스 플랫폼'으로 진화해야 합니다. 주민자치의 궁극적 성공 여부는 주민자치회라는 단일 조직이 일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자체 사업을 해치웠는가의 양적 지표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우리 주민자치회가 지역 내의 얼마나 다양하고 이질적인 주체들을 갈등 없이 촘촘하게 연결해 낼 수 있는가라는 '연결의 스펙트럼'이 성공의 척도가 될 것입니다. 다가올 미래에 주민자치회의 경쟁력은 사업의 크기가 아니라, 바로 그 '연결의 네트워크 파워'에서 나올 것입니다.
다양성이 담보하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위상
이번 행정안전부의 참고조례 개정안 중에서 제가 개인적으로 학술적 감동과 의의를 두고 바라본 대목은 바로 '주민 대표성의 비약적 확대' 조항입니다. 기존의 경직되었던 거주 기간 요건을 완화하여 진입 장벽을 낮추었으며, 일정 자격을 취득한 외국인 주민들 역시 우리 동네 주민자치회의 정식 위원으로 참여할 수 있는 법적 길을 개방하였습니다. 아울러 미래 세대인 청년층과 여성, 그리고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 계층의 의무 참여 비율 역시 명문화하여 조례 속에 녹여내었습니다. 이는 시의적절한 변화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역의 골목은 이미 다문화, 다세대, 다변화된 이질적 인간들이 공존하는 용광로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마을을 대표한다는 주민자치회 역시 그 다원화된 주민들의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어야 신뢰가 생깁니다. 특정 연령대의 은퇴 세대나 지역의 일부 토착 기득권 인사들만이 독점하는 경직된 조직 구조로는, 지역 사회 주민 전체의 보편적 신뢰와 동의를 얻어내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주민자치회가 지니는 대표성의 가치는 단순히 위원들의 머릿수나 정족수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지역의 소수성과 다양성을 얼마나 포용해 낼 수 있는가라는 '민주적 포용성'의 문제이며, 이 기준이야말로 향후 주민자치회가 지역 사회에서 획득하게 될 공적 신뢰의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주민자치 2.0, 삶이 민주주의가 되는 기적
우리는 흔히 주민자치를 행정 제도의 일환이나 테두리로 규정하곤 합니다. 주민자치는 평범한 지역 주민들이 내 이웃의 고통에 공감하고, 마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과정 속에서 주체적인 민주 시민으로 위대하게 성장해 나가는 '인간 해방의 문화적 과정'입니다. 행정은 조례를 고치고 법률을 만들어 제도의 외피를 구축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제도 속에 온기와 생명력을 불어넣어 연대의 공동체를 창조하는 것은 현장 사람들의 온기 어린 심장입니다. 주민이 스스로 먼저 배우고 깨어나며, 주민들이 공론장에서 격렬하게 토론하고 조율하며, 주민 스스로 최종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에 따른 사회적 책임과 결과까지 공동으로 짊어지는 '자치 문화'가 동네마다 문화로 안착할 때, 비로소 주민자치는 법률 제도를 넘어 우리의 일상이 됩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번 지방자치법 개정안의 통과를 주민자치 완성의 날이 아닌, 주민자치 2.0 시대'의 출발선이라 선언하고 싶습니다. 이 법률 조항이 우리 동네 소외된 독거노인의 밥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맞벌이 부부의 보육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우리 아이들의 통학로를 얼마나 안전하게 변화시키는지 등 '현장의 구체적인 삶의 변화'로 주민자치를 증명해 내는 일입니다.
법률 조문보다 위대한 현장의 연대
주민자치법제화전국네트워크가 걸어온 지난 5년의 풍찬노숙 대장정을 정리해야 한다면, 저는 주저 없이 전국의 동지들 앞에 이렇게 고백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단지 법률 조항 하나를 신설한 것이 아니라, 주권자인 주민이 스스로 연대할 때 지역사회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위대한 가능성을 대한민국의 역사 앞에 온몸으로 증명해 내었습니다." 우리가 걸어온 법제화의 여정은 결코 온실 속의 화초 같은 순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예상치를 비웃듯 가혹할 정도로 긴 인내의 세월이 필요했으며, 중앙 정치 권력의 냉혹한 기조 변화는 수차례 우리의 심장을 얼려버렸습니다. 여의도 정치권의 문턱은 높았고, 때로는 수개년간 쌓아 올린 투쟁의 성과물들이 단 한순간에 원점으로 돌리는 당혹감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전국의 동지들이 끝내 투쟁의 깃발을 꺾지 않고 전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대한민국이라는 위대한 민주공화국이 한 단계 더 성숙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절대적 숙명'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지난 1,500일의 시간은 법안 통과만을 유도하기 위한 정무적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전국의 현장에서 자치의 야성을 지닌 '진정한 시민 리더들을 길러내고 각성시킨 위대한 사람의 시간'이었습니다. 전국 방방곡곡의 골목에서 묵묵히 자치의 등불을 밝혀오신 주민자치위원님들, 현장의 모순을 타개하기 위해 청춘을 바친 마을 활동가들, 밤을 새워 이론적 기초를 제공해 준 양심적인 연구자들, 관료제 내부에서 외로운 싸움을 전개해 준 혁신 공무원들, 그리고 시민사회와 지방의회, 국회 안팎에서 정파를 초월하여 연대해 주신 수많은 깨어있는 시민들의 거대한 연합군이 없었다면 오늘의 위대한 승리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번 법제화 성공이 남긴 위대한 유산은 "평범하고 힘없는 개인들이 공동체의 이름으로 촘촘하게 연대할 때, 국가의 거대한 입법 권력조차 아스팔트 위에서 움직여낼 수 있다"는 '성공의 집단적 정서와 사회적 경험'을 우리 모두의 심장 속에 공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고립된 섬을 넘어 거대한 자치 생태계로
다가올 미래의 주민자치회는 과거처럼 주민자치회라는 단일 조직만의 폐쇄적인 힘과 자원만으로는 거대한 지역 소멸의 파고와 사회적 난제들을 절대 극복해 낼 수 없습니다. 동네 골목마다 고립된 섬처럼 존재하는 마을공동체 소모임 조직들, 지역 경제의 실핏줄이자 대안인 협동조합과 사회적기업 등 사회적경제 진영, 촘촘한 복지 그물망을 짜는 지역사회보장협의체와 자원봉사센터, 학교 어머니회와 청소년 자치 기구, 지역 사회복지관과 생활문화 예술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지역 내에 흩어져 숨 쉬고 있는 모든 다원화된 민간 주체들이 주민자치회라는 거대한 풀뿌리 공론장의 플랫폼 안으로 상호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연결될 때에만, 주민자치는 비로소 관치의 손길을 거부하고 새로운 차원의 단계로 진화할 수 있습니다. 저는 행정과 민간이 대등하게 결착하고, 주민과 주민이 계급장을 떼고 수평으로 연결되며, 마을 공동체와 또 다른 공동체가 서로의 우수 사례를 상호 학습하며 진화하는 이러한 연대의 구조야말로, 우리가 앞으로 건설해 나가야 할 '주민자치 2.0 시대'의 진정한 패러다임이자 풍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역 자치 공동체 내부의 집단지성과 자원을 연결하여 민간의 힘으로 돌파해 나가는 위대한 풀뿌리의 자생력이야말로 앞으로 우리가 구축해야 할 자치의 본질입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주민자치 2.0의 거대한 흐름이 일시적인 유행으로 끝나지 않고 백년지대계로 지속 가능하기 위해서는, 풀뿌리 사회적경제 진영과의 강력한 비즈니스적 연대 체계 구축, 지역 기반의 전문적인 민간 중간지원조직의 독립성 사수 및 활성화, 그리고 주민자치 활동을 제도적·재정적으로 백업해 줄 수 있는 주민자치회 자체의 사단법인화 및 전국적 자치 네트워크 법인의 육성 역시 핵심 과제가 될 것입니다.
130년 전 집강소의 피가 우리 몸에 흐른다
대한민국의 위대한 주민자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130여 년 전, 이 땅의 민초들이 외세의 침략과 봉건 영주들의 가혹한 수탈에 맞서 스스로 일구어내었던 동학의 '집강소(執綱所)' 전통, 이웃 간의 환난상휼을 자치적 법도로 규정했던 민간의 '향약조규(鄕約條規)', 그리고 마을의 대소사를 주민들의 만장일치 대화로 풀어내었던 '면회(面會)'와 '리회(里會)'의 역사 속에서, 우리의 위대한 선조들은 이미 행정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마을의 평화적 질서를 바로잡고 공동체의 결핍을 주체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찬란한 자치의 DNA와 지혜를 증명해 낸 바 있습니다. 물론 13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21세기의 현대 사회와 지역의 과제들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로 복잡하며 다원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의 강물이 아무리 흘러도 결코 변하지 않는 주민자치의 원칙이 하나 존재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마을의 위대한 미래는, 행정 관료의 기획서가 아니라 오직 그 지역의 흙을 밟고 살아가는 평범한 주민들의 거친 손과 지혜를 통해서만 개척된다는 주권재민의 진리입니다. 주민자치회는 명실상부한 주권자들의 대표성을 기반으로 삼아 마을의 의제를 주도적으로 발굴하고, 지방정부의 예산 편성 권력과 정책 기획 과정에 당당하게 주체로 참여하며, 공직 사회와 대등하게 협력하여 지역의 미래 청사진을 설계해 나가는 '일상 속 주권자 민주주의의 플랫폼'입니다. 이제 읍·면·동이라는 기초 행정 구역은 중앙 권력의 말단 관료적 통제 단위를 탈피하여, 주권자인 시민들이 자기가 살아가는 일상 공간 속에서 민주주의의 위대함과 연대의 기쁨을 체험하고 호흡하는 '가장 존엄한 민주주의의 고향 공간'으로 격상되어야만 합니다. 저는 마침내 성취해 낸 이번 지방자치법 제17조의2 개정안의 통과야말로, 대한민국의 모든 골목길을 주권자의 영토로 바꾸어 놓을 전환의 신호탄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다시, 역동하는 풀뿌리의 심장 속에서
주민자치법제화전국네트워크라는 조직은 법안 제정이라는 시대적 사명을 완수하고 명예롭게 역사 속으로 간판은 내렸으나, 1,500일 동안 피와 눈물로 결착된 전국의 자치 동지들과의 거대한 주권자 연대만큼은 해산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해산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의도의 낡은 정치 문법을 과감히 넘어서서, 전국의 현장 골목길에서 서로의 실천적 성과를 치열하게 배우고, 디지털 공론장을 통해 촘촘하게 연결될 것이며, 시행착오의 경험을 공유하는 가운데 깊이 있는 자치의 영토를 확장해 나갈 것입니다. 우리가 걸어갈 주민자치 2.0의 길 역시 과거가 그러했듯 수많은 정치적 역풍과 관료제 벽을 마주해야 할 것이며 녹록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5년간의 눈물겨운 승리의 역사가 우리 전국의 동지들의 뼈와 살 속에 아로새겨 준 것은 진정한 민주주의와 풀뿌리 자치는 정치가나 권력자가 시혜적으로 공여해 주는 것이 아니며, 오직 자기 삶의 주인으로 깨어나 포기하지 않고 광장과 골목을 지켜낸 평범한 주권자들의 연대를 통해서만 쟁취해 낼 수 있다는 승리의 법칙입니다. 저는 이제 사무총장의 직함을 내려놓고, 전국의 동지들이 땀 흘려 일구고 계시는 거칠고도 역동적인 주민자치의 진짜 현장 속으로 들어가 여러분과 대등한 리더로 조우하고 싶습니다. 더 넓은 품으로 포용하고, 더 깊은 깊이로 소통하며, 대한민국 주민자치 2.0의 신기원을 여러분과 손잡고 함께 건설해 나가기를 열망합니다. 지난 1,500일간의 고독하고도 험난했던 법제화 길 위에서 기꺼이 자신의 삶을 함께 연대해 주신 전국의 모든 주민자치 동지들과 시민 여러분께 고개 숙여 진심으로 깊은 경의와 감사를 올립니다. 우리의 위대한 자치 항해는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새로운 세기를 향해 웅장하게 닻을 올릴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역동하는 주민자치의 현장에서 반갑게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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