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리더십
강정모 소장(시민교육콘텐츠연구소)
□ 평화 리더십의 개념
나는 ‘평화 리더십’에 대해 두 가지를 의미를 생각한다. 첫째는 평화를 만드는 리더십(peacemaking leadership)이다. 평화를 창조해내는 과정 속에서 발휘되어야 할 리더십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내용이다. 둘째는 평화의 리더십(leadership of peace)이다. 평화를 지향하는, 평화적 상태를 좋아하는 리더십이란 무엇인가를 의미한다. 이 차이는 현실에서 상당히 다른 양태로 나타난다. 신약성서에서 예수가 설법한 말씀 중 핵심은 산상설교이다. 그 중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개역판)”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은 ‘화평케’ 즉 ‘평화를 만드는’,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make peace’라는 의미로 쓰여 있으면서도 오랫동안 ‘평화를 사랑하는’, ‘평화를 좋아하는’ 의미로 새겨져왔다. 이 차이는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평화를 좋아해야 한다. 하지만 평화를 좋아해도 평화를 만들지 않을 수도 있고, 평화를 위해서 일하지 않을 수도 있다.
평화를 만드는 것과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은 평화를 좋아하는 것과는 다르게 많은 대가와 책임을 요구받는다. 미국의 반전 평화활동가인 다니엘 베리건 신부는 ‘우리는 외치기를, “물론 우리 평화를 갖자!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정상 상태를 유지하자. 우리는 아무것도 잃지 말자, 우리들의 삶에는 아무 손상을 입지 말자, 우리는 감옥이나 나쁜 평판이나 관계의 단절 같은 것은 모르는 것으로 하자” 하고 말한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없어서 평화를 얻지 못한다. 평화를 만드는 것이 적어도 전쟁을 하는 것만큼 비싼 값을 지불해야 하므로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아무래도 위급하며, 아무래도 분열을 일으키며, 아무래도 불명예와 감옥과 죽음이 뒤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분의 말처럼 평화를 만든다는 것은 어쩌면 역설적으로 평화롭지 않은 상태를 겪어야 한다. 그래서 단지 평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나,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무척 혐오하고, 싫어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평화 리더십>이라는 제목의 의미를 평화를 만드는 리더십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평화를 좋아하는 두 번째의 의미도 놓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평화를 만들다보면 반평화와 혼돈을 겪게 되고, 평화의 감수성을 잃어, 내면의 평화가 흔들려 본말이 전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라 영혼을 가진 존재이다. 굳센 의지만으로는 평화를 만드는 일을 지속할 수 없다. 또한 궁극적인 평화의 상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평화를 만드는 과정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평화를 만드는 리더십은 만드는 과정중에 평화를 느끼고, 누릴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평화를 만드는 리더십과 평화를 좋아하는 두 가지를 모두 의미함을 밝힌다.
□ 평화 리더십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배경과 정의
“세계에 대한 자기 내면의 편견과 무지를 지속적으로 자각하고 변혁하려고 노력하며, 두려움을 넘어선 의식의 힘으로 폭력적 상황에 비폭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책임감”
나는 시민운동이전부터 리더십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졌다. 리더십에 대한 관심이전에 내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은 ‘인간(人間)’이다. 특히 ‘의미 있는 일을 해나가는 사람들은 어떤 능력을 갖추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지금까지 나의 중심 관심사였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특히 개인사적으로 나의 성장환경은 주로 교회였다. 기독교를 중심으로 훈육받은 나의 성장환경은 교회에서의 가르침이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성인이 된 지금 어릴적 성장환경은 그다지 좋게 평가되지 않는다. 부모님과 교회 지도자들의 가르침과는 반대로 부모님은 주일예배후 다른 교인들에 대한 비판과 뒷담화(?)를 거의 매주 해대느라 신경이 곤두서계셨으며, 교회는 분란과 분열로 늘 씨끄러웠고, 목회자들은 공격을 당하거나 스스로 불명예를 초래하여 리더십을 실각하는 모습을 봐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갈등상황에서도 나를 기독교에 계속 붙잡아놓았던 것은 ‘예수’라는 존재였다. 그의 매력과 능력은 불일치한 성장 환경을 새롭게 보게 하였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예수’라는 존재를 살아내야 하는 과제는 어려웠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나의 내면에 ‘큰 바위 얼굴’을 그려가면서 내면의 큰 바위 얼굴과 나의 지도자들을 비교해왔다. 하지만 나다니엘 호손의 소설에 나오는 ‘큰 바위 얼굴’처럼 리더십은 만날 수 없었다. 최근 나는 내면에 ‘큰 바위 얼굴’ 혹은 리더십의 ‘파랑새’를 그려왔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상적 리더십은 존재하지 않는다. 리더십은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완성되어가는 것이다. 리더십은 존재(存在)가 아니라 과정(過程)이다.
나는 ‘의미있는 일을 해나가는 사람들은 어떤 능력이 필요한가?’라는 주제에 골몰하면서 들춰본 책들은 경영, 경제분야의 책들이었다. 현대 리더십은 특히 경영학에서 연구되었기 때문에 그 쪽 분야에서 나온 책들을 참조하였다. 의외로 기독교 분야에서 리더십 관련 자료가 많다. 아무래도 목회자들에게 현실적으로 요구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 분야의 리더십 관련한 서적들을 읽어보면 기본골격은 경영학적 리더십인데 도색만 기독교적 용어로 되어 있는 인상을 받았다. 이러한 영향으로 기업 운영하듯이 교회를 운영하는 행태가 많이 나타난다고 생각된다. 많이 있을 것 같은 정치, 행정 그리고 군사분야에서는 뚜렷한 리더십의 연구가 그다지 되어있지 않은 듯 하다. 이유를 추론해보면 이미 정치, 공공행정과 군사분야는 리더십보다는 시스템으로 움직이며, 변화보다는 안정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리더십에 대한 내용들은 시민교육과 시민운동에 관심 있는 나에게 안 맞았다. 특히 가치적으로 괴리되었다. 그러면 시민교육과 시민운동은 리더십이 없어도 될 수 있을까? 물론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시민교육과 시민운동은 리더십이 필요하며, 요구된다. 순수한 가치지향과 강철같은(?) 의지만 가지고서는 지속가능할 수 없다. 이유는 단순하다. 시민교육도 시민운동도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더욱 정교하고, 세밀히 연구되어진 방법과 훈련이 개발되고, 적용되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이 <평화 리더십>을 연구하게 된 배경이다.
맨 처음에 제시한 두 줄로 된 정의는 임시로 그간 몇몇 문헌들을 읽으며 만들어 본 평화 리더십의 정의이다. 그간 참조한 책들 중 리더십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은 [Leadership without easy answers, 한국어판 제목은 하버드 케네디 스쿨의 리더십 수업]이라는 책이다. 그 외에는 리더십을 직접 언급한 것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다. 내가 매우 영향받은 스티븐 코비라는 사람의 그 유명한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의 7가지 습관의 내용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리더십이라고 언급하지만 사실 리더십이라기보다는 마치 인류의 지혜를 체계적으로 구조화시킨 것이다. 효율을 창출하기 보다는 평화와 진리를 창출하는 리더십에 대해서 연구하고, 구조화 해놓은 것은 거의 없다. 그래서 ‘가치, 의식, 평화, 운동, 내면, 비폭력, 다양성, 의사소통 등’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읽은 책과 자료를 중심으로 엮어본 정의(定意)다.
평화 리더십은 내부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내면의 변화로 우주와 세계에 대한 무지를 자각해야 한다. 무지에 대한 자각은 의식의 확장이다. 그 다음에는 두려움을 넘어서는 용기(Courage)가 필요하다. 무지에 대한 자각은 두려움을 넘어서는 의식의 단계까지 올라가야 평화를 향한 긍정적 힘(Power)의 발휘가 가능하다. 이러한 내용은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의 연구저서인 [의식혁명]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모든 리더십이 그런 것처럼 평화 리더십도 힘(Power)을 요구받는다. 그런데 이 때의 힘은 세기가 아니라 질(質)이다. 힘(Force)은 수치심(羞恥心), 죄의식 상태에서도 발휘되며, 두려움의 상태, 욕망이 가득한 상태, 자존심에 고양되어 있는 상태에서도 발휘된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상태들도 나름대로 무지에 대한 자각의 과정을 거친 것들이다. 현실적인 힘의 세기로 봐서는 가공할 만하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상태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이 아무리 가공할 힘이라도 그 힘은 평화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평화는 반드시 용기(아래 용기의 개념에 대한 시(詩) 참조) 이상의 상태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으로써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폭력적 상황에서 비폭력적으로 대응이다. 이것은 지적, 영적(정서적), 육체적 등 통합적인 훈련이 요구되는 평화 리더십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앞에서 언급된 요구되어지는 힘이 투여되어질 지점이기도 하다. 먼저 폭력적 상황을 감지해야 한다. 즉 평화적 감수성이 충만해야 한다. 폭력에 대한 민감도를 높이는 것이나, 평화적 감수성이 충만해지는 것이나 같은 의미다. 평화 리더십은 ‘폭력 민감도’와 ‘평화 감수성’을 모두 높일 필요가 있다. 같은 지점에서 만나지만 다른 차원이기 때문이다. 핵심은 이러한 ‘자극(stimulation)’에 어떻게 ‘반응(response)’할 것인가이다. 평화 리더십은 이러한 폭력적 자극에 ‘비폭력(nonviolence)’으로 반응할 것을 요구받는다. 비폭력으로 반응한다는 것은 창조적 작업이다. 당위(當爲)적 태도에서는 나오기 힘들다. 비장한 마음만으로는 잘 나오지 않는다. 나아가 자신이 속한 집단이 비폭력적 선택을 하도록 설득하고(원칙을 세우고), 비전과 전략을 제시하며, 궁극적 승리에 대한 희망을 제시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마지막에 ‘책임감(responsibility)’이라고 마무리하였다. 스티븐 코비는 책임감(responsibility)을 response + ability 즉 반응하는 능력이라고 풀이하였다. 평화 리더십은 폭력적인 상황에서 비폭력으로 반응하는 능력(힘)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 평화 리더십의 7가지 요소
① 내면으로부터 시작하여 외부로 가는 시각, 선택의 힘, 자유의지의 자각과 활용
② 발코니로 나오기 (내면의 객관화, 자기의 객관화, 자기 바라보기, 내면 성찰)
③ 문제를 보는 시각의 차별화 (기술의 문제와 적응의 문제의 구별)
④ 도전의 과제(갈등과 이슈)가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지 않도록 함
- 당사자들에게 돌려주도록 함, 문제의 직접적 당사자들(자신 포함)이 책임을 지고, 그것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 (민주주의적 가치에 대한 믿음)
- 자신만이 그 가치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떠나더라도 사람들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다룰 수 있게 하는 태도
- 사람들에게 현상이 아니라 좀 더 궁극적인 가치에 집중하도록 학습하고 유도하는 태도
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원칙 견지 : 민주주의적, 비폭력적 수단과 과정
⑥ 의식수준의 계속적 고양 (학습의 습관) : 모든 것을 학습의 기회로 삼는 태도
⑦ 통합적 시각 : 인격적 시각, 연결적 시각
- 투사, 적, 상대, 원수의 관점에 대한 전향적 시각
- 무의식에 대한 경계, 깨어있음에 주목 (Awaking)
- 나와 나, 나와 신, 나와 이웃, 나와 자연과의 화해와 일치
- 경계를 넘어선 시각
■ 설명1) 간디의 손자 아룬 간디의 연설 예화
- 넬슨 만델라의 27년의 복역과정에서의 변화
- 간디의 소금행진
- 간디의 국민회의에서의 반응과 선택 예화
■ 설명2) 기술의 문제와 적응의 문제
- 병의 유형을 통한 의사의 반응을 통해서 본 기술과 적응문제 구분
상황별 유형의 특징
상황 | 정의 | 해결책 및 실행 | 일에 대한 책임의 중심 | 일의 종류 |
유형1 | 명백함 | 명백함 | 의사 | 기술적 |
유형2 | 명백함 | 학습 필요 | 의사와 환자 | 기술적 및 적응적 학습 |
유형3 | 학습 필요 | 학습 필요 | 환자 〉의사 | 적응적 |
- 타코마시의 문제에 대한 럭켈소스 청장의 리더십 이야기
■ 설명3) 마틴 루터 킹의 민권운동과 존슨 대통령의 베트남 전쟁 예화
■ 설명4) 리더는 끊임없는 학습이 요구되며 학습이 요구되고, 수행된 만큼 리더십은 지속된다. 학습이 정지되면 반드시 리더십은 쇠퇴하고, 다른 사람에게 리더의 권한이 옮겨진다. 고로 리더는 학습하는 자이다. 학습은 통합적 활동이어야 한다. 경험(Experience)-공부(Study)-사색(Think,Meditation, Contemplation)-반복훈련(Repetitive Training)이라는 4가지 방향으로 되어야 온전한 학습(Learning)이 이루어지며, 이런 총체적 과정을 통해야만이 진화(進化)가 가능하다.
- 성장(진화)곡선 : 계단식 진화
■ 설명5) 통합적 시각 - 켄 윌버와 마틴 부버, 월터 윙크의 철학
- 4상한 (I/We/It/Its) / 나와 너, 나와 그것 / 원수를 통해 자신을 바라보기
□ 마무리
연구의 효과를 위해 연역적 방식으로 접근하였다. 왜냐하면 기존의 리더십과는 생소한 내용이며, 평화 리더십이라고 명명되는 세미나들은 남북문제에 국한된 정치적, 제도적 과정에 대한 이해가 많아서 참고할 이론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현 한국사회에서 남북문제는 평화문제에서 일차적인 이슈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남북문제는 남북간의 정치적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무리 진보, 민주정권이 남북문제를 잘 풀어 전향적인 통일과 화해의 정책을 마련하고, 실현하려고 노력해도 남한내에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면 지속가능한 남북의 평화적 모색을 실현할 수 없다. 남북간의 평화와 통일의 문제는 전략과 제도와 대안만으로 불가능하다. 통합적, 내면적, 문화적 요소가 포함된 평화 리더십이 발휘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몽양 여운형 선생의 말씀과 함석헌 선생의 말씀은 매우 예언자적이다.
“분열해 있는 것은 소위 지도자뿐이요, 민중은 통일되어 있습니다. 주인은 민중인 데 주인의 심부름꾼인 지도자들이 주인의 의사를 무시하고 분열만 일삼으면 주인이 쫓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통일은 시멘트와 모래가 콘크리트가 되는 과정과 같은 작용을 통해 결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독선적이거나 폭력적인 방식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것입니다. (몽양 여운형)”
“단적으로 말해볼까? 이제라도 우리가 살려면 통일이 되어야지 남북이 하나로 되지 않고는 절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은 알지. 그것은 누구나 다른 말이 없을 것이다. 하나 남북이 통일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 백 가지 이론, 천 가지 수단을 다 그만두고 어린 아이도 다 알 것이 남한만이 우선 완전히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는 아니 될 것이다. (함석헌)”
아무쪼록 나는 평화 리더십을 연구하면서 먼저 내 자신이 변화되고 싶다. 이것이 시민교육과 시민운동에 기여하길 바란다. 활동가들이 한국사회의 평화와 통일의 문제가 결코 거대하거나 특별하여 자신과는 동떨어진 문제가 아니며, 자신의 삶과 연결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참여욕구를 동기부여하면 좋겠다.
□ 연구도서 목록
1. 하버드 케네디 스쿨의 리더십 수업, 도널트 하이페츠
2. 성공하는 사람들의 8번째 습관, 스티븐 코비
3. 의식혁명, 데이비드 호킨스
4. 평화에 이르는 길, 아빈저 연구소
5. 나와 너, 마틴 부버
6.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7.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 월터 윙크
8. 만델라 평전
9. 간디 전기
10.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11. 간디와 마틴 루터 킹에게서 배우는 비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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