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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칼럼[콩나물시루]

당신의 부지런함은 혹시 '불안'의 증표입니까? : 뇌를 깨우는 '느린 리듬'의 힘

강정모 소장 2026. 3. 14. 13:19

뇌의 본능과 행동편향의 함정

인간의 두뇌는 진화론적으로 단기적인 성과와 비약적인 발전에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불확실한 환경에서 가만히 생각하기보다 즉각 행동함으로써 생존 확률을 높였습니다. 이러한 유전적 각인은 현대 사회에서 '행동편향(Action Bias)'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무엇이라도 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우두커니 생각하는 사람보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을 더 높게 평가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뇌는 장기적인 지수적 성장을 지각하는 데 서툽니다. 선정적인 뉴스나 빠른 변화에는 민감하지만, 매일 조금씩 쌓이는 꾸준함의 가치는 쉽게 간과합니다. 롤프 도벨리는 저서 《불행피하기 기술》에서 장기적 안목이 부족한 우리 뇌의 한계를 지적하며, '꾸준함의 비밀'을 강조했습니다.

장기적 성공을 만드는 지루함의 힘

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이 팔린 책들은 화려한 베스트셀러가 아닌 성경, 코란, 어린왕자 같은 '롱셀러'들입니다. 출판사의 생존을 책임지는 것은 반짝이는 화제작이 아니라 장기간 꾸준히 팔리는 책들입니다. 우리의 삶과 사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찰리 멍거는 "뛰어나지 않아도 된다. 다만 다른 사람들보다 평균적으로 조금만 더 영리하게 오래오래 가면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장기적인 성공은 대개 느리고 지루합니다. 하지만 그 지루한 과정을 견디는 힘이 최상의 결과를 도출합니다. 인내와 꾸준함은 과소평가되는 덕목이지만, 사실 그것이 삶의 진리에 가장 가깝습니다. 능력의 범위를 설정했다면, 가능한 한 오래 그 안에 머물며 내실을 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위대한 성취를 지탱한 조용한 일상

조용한 삶일수록 실제로는 더 생산적일 수 있습니다. 역사적 위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명확해집니다. 칸트는 평생 고향에서 10마일 이상 벗어나지 않은 채 규칙적인 일과를 반복했습니다. 다윈은 세계 일주 후 죽을 때까지 집에서 조용히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소크라테스 역시 대부분의 시간을 아내와 함께 평범하게 보냈습니다. 그들의 위대함은 외부의 화려함이 아닌, 소소하고 조용한 일상의 반복에서 나왔습니다. 산만함과 좋은 아이디어, 분주함과 깨달음 사이에는 긍정적인 상관관계가 없습니다. 오히려 깊은 성찰은 일시적인 멈춤과 정교한 정적 속에서 잉태됩니다.

주니어의 부지런함과 시니어의 가만히 있기

실무자 시절에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이 미덕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직급이 올라갈수록 실무자처럼 바쁘게만 움직이는 것은 위험합니다. 이는 '부지런함'이 아니라 역할 변화에 대한 '불안'의 표현일 가능성이 큽니다. 리더의 책임은 '어떻게(How)'가 아니라 '무엇을(What)' 목표로 삼을 것인지 결정하는 데 있습니다. 찾고, 선택하고, 책임지는 과정은 육체적인 '일하기'가 아니라 고도의 '생각하기'입니다. 생각하기는 일하기를 의도적으로 멈추고 권한을 위임할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가만히 있는 것은 무기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과열된 심리를 냉각시키고 더 나은 도약을 준비하는 생명 약동의 과정입니다.

중요하지만 긴급하지 않은 것에 대한 투쟁

스티븐 코비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서 '중요하지만 긴급하지 않은 일'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고 본질적인 과업을 도출했다면, 그다음은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Slow & Steady)' 실행하는 것뿐입니다. 이는 동서고금의 성인들이 전하는 공통된 지혜입니다. 그러나 많은 리더가 긴급한 현안에 밀려 본질을 놓칩니다. 버트란트 러셀은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인생의 대부분은 지루한 것들로 채워져 있음을 인정하라고 했습니다. 사건과 사건 사이를 잇는 평범한 일상이 튼튼해야만 비로소 특별한 사건도 의미를 갖습니다. 일상이 무너진 혁신은 사막 위의 성과 같습니다.

속도의 폭력을 이기는 페이비언의 지혜

영국의 페이비언 사회주의는 한니발을 무찌른 로마 장군 파비우스(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지구전 전략에서 유래했습니다. 페이비언은 '느릿느릿, 천천히'를 의미합니다. 버트란트 러셀은 급진적이고 속도를 강조하는 이데올로기들이 얼마나 파괴적이고 비인권적일 수 있는지 경고했습니다. 모든 급진성은 도덕성을 상실할 위험을 내포합니다. 시민운동과 복지 현장에서도 속도에 대한 강박은 실천의 질을 떨어뜨립니다. 변화는 한순간의 폭발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서히 차오르는 인내의 결과물이어야 합니다.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며, 그 방향을 유지하는 끈기입니다.

비영리 현장에서의 사명 내재화와 리듬

비영리 조직에서 '천천히와 꾸준히'가 가장 절실한 지점은 사명의 내재화입니다. 최고 리더부터 실무자까지, 조직의 비전이 현재 어떤 맥락으로 적용되는지(Contextualization) 치열하게 토론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이 생략되면 활동은 단순한 '노동'으로 전락합니다. 사명에 대한 체화가 부족한 조직은 건강함을 잃고 오직 '가성비'만 따지는 기계적 집단이 됩니다. 리더는 정기적으로 일을 멈추고 팀원들이 사명을 온몸으로 익힐 시간을 확보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왜 이 일을 하는지, 우리의 분주함이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하는지 조망할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해야 합니다.

 

지혜와 역량을 수렴하는 실천가의 자세

시민단체 활동가와 사회복지사 여러분, 여러분이 마주하는 현장은 늘 긴급하고 분주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멈춤'의 감각을 익히시기 바랍니다. 주민 조직화와 지역 복지는 단기간에 성과가 나타나는 분야가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고 마을의 문화를 바꾸는 일은 지독할 정도로 느리고 지루한 과정을 필연적으로 동반합니다. 이 지루함을 견디는 힘이 바로 전문성입니다. 전문성이 있는 전문가는 그 분야를 잘 하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오래한 사람일 가능성 더 많습니다. 천천히 꾸준히 체화된 리듬감은 갑자기 찾아오는 결정적인 기회를 붙잡을 수 있는 강력한 '악력'이 되어줄 것입니다. 현장의 소란함 속에서도 내면의 고요를 유지하며, 긴 호흡으로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여러분의 길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