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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칼럼[콩나물시루]

실패해도 무너지지 않는 유일한 자산, 위기의 순간, 사람을 무엇으로 보는가

강정모 소장 2026. 3. 14. 14:36

 

신뢰와 성패의 비대칭성

우리는 흔히 성공이 신뢰를 담보한다고 믿습니다. 성과가 쌓이면 자연스럽게 권위와 믿음이 따라올 것이라 착각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다릅니다. 수많은 성공을 거두고도 단 한 번의 선택으로 신뢰를 잃는 이가 있는가 하면, 연이은 실패 속에서도 주변의 단단한 지지를 받는 이가 있습니다. 성공과 실패는 가시적인 결과의 영역입니다. 반면 신뢰는 존재의 영역입니다. 이 둘은 서로 다른 층위에 존재합니다. 실적이 화려하다고 해서 그 사람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사업이 무산되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진정성이 훼손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을 관통하는 태도입니다.

사람을 대하는 관점 : 수단인가 목적이냐

신뢰의 향방을 결정짓는 핵심 요인은 명확합니다. 타인을 '목적'으로 대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특히 시민운동과 사회복지 현장에서 이 구분은 조직과 관계의 존립과 직결됩니다. 주민 조직화나 마을 복지 사업을 수행할 때, 주민을 사업의 실적을 채우기 위한 숫자로 여기는 순간 신뢰는 균열을 일으킵니다. 반면 주민 한 사람의 삶을 그 자체로 존중하며 함께 호흡할 때, 사업의 성패와 상관없이 깊은 유대가 형성됩니다. 사람을 도구화하는 효율성은 일시적인 성과를 낼 수 있지만, 결코 지속 가능한 신뢰를 구축하지 못합니다. 

위기에서 드러나는 신뢰의 실체

이러한 관점과 태도의 차이는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이 순조로울 때는 누구나 인격적인 태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신뢰의 실체는 내외적인 '위기'가 닥칠 때 비로소 선명해집니다. 예산이 삭감되거나, 갈등이 폭발하거나, 개인적인 한계에 부딪히는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는 본연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실제 사례로 1994년 파산 위기에 처했던 미국의 아웃도어 기업 '파타고니아(Patagonia)'를 들 수 있습니다. 당시 창업자 이본 쉬나드는 경영 위기 상황에서도 직원들을 해고하는 대신, 기업의 철학인 '환경 보호'와 '직원 복지'라는 목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객들에게 "우리 옷을 사지 마세요(Don't Buy This Jacket)"라는 캠페인을 펼치며 소비 지향적 구조를 비판했습니다. 단기적인 수익(수단)보다 환경과 사람(목적)을 우선시한 이 진정성은 오히려 소비자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이끌어냈고, 파타고니아를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출처: 이본 쉬나드 저, 『파타고니아,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 또한 국제 구호 NGO인 '세이브더칠드런(Save the Children)'의 초기 역사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창립자 에글렌타인 젭은 1차 세계대전 직후, 적국이었던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아이들을 돕자는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당시 영국 대중은 "적국의 아이들을 돕는 것은 반역"이라며 거세게 비난했고, 그녀는 체포되어 벌금형을 선고받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들을 정치적 수단이 아닌 '생존 그 자체가 목적인 존재'로 보았습니다. 이 단호한 태도는 결국 '아동권리선언'의 모태가 되었고, 전 세계적인 신뢰를 받는 기구로 성장하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출처: 세이브더칠드런 역사 기록물), 국내 사례로는 '원주 소비자협동조합(현 원주한살림)'의 초창기 갈등 극복 사례를 꼽을 수 있습니다. 80년대 초, 극심한 흉작으로 공급할 물량이 부족해지는 위기가 닥쳤을 때, 조직은 사업적 손실(실패)을 감수하고도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직거래 약속'을 지키는 데 집중했습니다. 수입 농산물로 대체하여 위기를 모면하자는 유혹을 뿌리치고, 고통을 분담하며 서로를 생존의 동반자로 대우한 이 경험은 오늘날 한국 생협 운동이 '신뢰'의 대명사가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출처: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 역사 사례집)

 

지혜와 역량을 수렴하는 현장의 힘

시민단체 활동가와 사회복지 종사자 여러분, 그리고 지역의 최일선에서 주민과 만나는 마을 복지 담당자 여러분. 우리가 마주하는 현장은 늘 위기의 연속입니다. 갈등은 일상이고 자원은 늘 부족합니다. 하지만 그 위기는 동시에 우리의 신뢰를 증명할 가장 강력한 기회이기도 합니다. 신뢰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위기의 순간에 사람을 대하는 정직한 태도에서 나옵니다. 사업의 성과라는 지표에 매몰되지 않고, 사람이라는 본질적 가치에 집중할 때 현장의 지혜는 비로소 빛을 발합니다. 여러분이 가진 전문성은 주민을 수단으로 통제하는 기술이 아니라, 주민과 함께 목적지를 찾아가는 동행의 역량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목적으로 대하는 그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어떤 실패 속에서도 신뢰라는 이름의 가장 단단한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