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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칼럼[콩나물시루]

주민동아리 비전설정 워크숍 : 우리 배의 목적지는 선원들이 정한다.

강정모 소장 2026. 5. 25. 19:37

끝을 시작하라: 목적지를 먼저 그려야 하는 이유

마을 공동체와 주민 조직을 마주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그리고 현장의 활동가들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수많은 공익 활동과 주민 동아리가 열정으로 문을 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부 갈등에 부딪히거나 "우리가 지금 무엇을 위해 이 고생을 하고 있지?"라는 권태와 무력감으로 조직동력이 저하됩니다. 이유는 명확합니다. 사다리를 얼마나 빠르게 올라갈 것인가라는 '방법()'에만 생각하고, 정작 그 사다리를 어느 벽에 걸쳐놓아야 하는가라는 '방향()'에 대한 합의를 놓쳤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인 조직경영 구루인 스티븐 코비()는 그의 저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서 두 번째 습관으로 "끝을 시작하며 행동하라()"를 제시합니다. 이는 모든 창조가 마음속에서 첫 번째로 이루어진 후, 실제 현실에서 두 번째로 구현된다는 '정신적 창조'의 원리를 말합니다. 건축가가 벽돌을 쌓기 전 설계도를 먼저 그리듯, 주민 동아리 역시 본격적인 활동의 발을 내딛기 전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최종 목적지, 즉 '비전과 사명'을 스스로 정의해야 합니다. 사회복지 현장에서 흔히 범하는 오류 중 하나는 기관이나 담당 사회복지사가 미리 만들어 놓은 목적과 비전을 주민들에게 일방적으로 제시하거나 동의를 구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타인이 그려준 목적지는 내 삶의 나침반이 될 수 없습니다. 주민 스스로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며 우리의 항로를 직접 결정할 때, 비로소 주도성과 지속 가능한 동력이 생겨납니다. 최근 서울시의 한 장애인종합사회복지관의 주민들을 위한 장애이해교육 콘텐츠 개발 및 교육 주민동아리 회원들과 함께한 비전 수립 워크숍은 이러한 주민 주도성이 어떻게 조직의 사명으로 발현되는지, 그리고 현장의 촉진자가 어떤 지혜를 발휘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모델이 될 것 같아서 소개합니다.

피라미드 토론: 집단지성이 빚어낸 흔쾌한 합의

주민 조직 현장에서 자주 목격되는 풍경 중 하나는, 네 명이 모여 두 시간을 토론해도 서로 자신의 의견만 주장하다 결론도 내지 못한 채 앙금만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입니다. 의사결정 과정이 민주적이지 못하거나 토론을 위한 효과적 촉진 도구가 없을 때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장애인종합복지관 주민동아리의 기존 회원들과 신입 회원들이 모인 워크숍 현장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주민들의 아이디어를 체계적으로 수렴하는 '피라미드 토론()' 기법을 응용했습니다. "2027년 12월 말까지, 우리 동아리이라는 배는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까요? 앞으로 2년 동안 우리가 도달하고 싶은 미래의 가치를 포스트잇에 적어주세요." 포스트잇 한 장에는 하나의 가치와 단어만 적어야 하며, 작성하는 동안에는 옆 사람과 대화하지 않고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스티븐 코비가 강조한 '정신적 창조'의 단계를 주민 개개인의 몫으로 돌려준 것입니다. 침묵 속에서 동아리 회원들은 저마다의 마음속에 품고 있던 동아리의 미래를 문장으로, 단어로 빚어냈습니다. 그 다음 단계부터 피라미드 토론의 묘미가 발휘되었습니다. 개인의 생각을 적은 후, 바로 옆에 앉은 짝꿍과 2인 토의를 거치며 쏟아진 아이디어를 '중요성'을 기준으로 가급적 반으로 압축하도록 했습니다. 서로의 포스트잇을 비교하며 유기적으로 겹치는 가치는 합치고, 덜 시급한 단어는 걷어내는 과정이 주민들 사이에서 주도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이어 2인 커플이 다시 옆 커플과 만나 4인 모둠 토의로 확장되었습니다. 신입 회원들의 신선한 시각과 기존 회원들의 깊이 있는 경험이 테이블 위에서 자연스럽게 융합되었습니다. "우리 모둠의 생각들을 꿰뚫는 단 하나의 핵심 키워드는 무엇일까?" 주민들은 서로 양보하고 조율하며 여러 장의 포스트잇을 융합하여 새로운 한 장의 가치 카드로 재탄생시켰습니다. 놀라운 점은 이 모든 과정에서 고성이나 갈등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단계별로 짝꿍과 소통하며 논리적으로 압축해 올라왔기에, 주민들은 단 15분 만에 전체 모둠의 집약된 방향성을 도출해 내는 '흔쾌한 합의'의 효과를 경험했습니다.

두 가지 나침반: 역량과 연대의 갈림길

이러한 치열하고 민주적인 피라미드 토론 과정을 통해 장애인종합복지관 주민동아리 회원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담긴 두 그룹의 최종 핵심 단어들이 도출되었습니다. 한쪽 테이블에서는 우리 내부의 단단한 성장을 의미하는 [역량강화, 경계 허물기, 지속가능한 활동]을 써냈고, 다른 쪽 테이블에서는 공동체의 가치를 지향하는 [함께, 지속적인 방향, 존중, 따뜻한 세상]이라는 온기 어린 키워드를 완성했습니다. 워크숍 현장에서 이 두 갈래의 주민 자산들을 유기적으로 엮어, 동아리의 정체성인 '발달장애 어린이 대상 그림책 콘텐츠 제작 및 교육 활동'이 선명히 투영된 두 가지 통합 비전 안을 주민들에게 제안해 드렸습니다. 제1안은 내부 역량강화와 성장을 품은 비전(역량강화 포함형)으로, "역량 강화를 통해 경계를 허물고, 함께 존중하며 따뜻한 세상을 열어가는 지속 가능한 꿈꾸는 그림책"입니다. 우리 내부의 전문성과 지식 역량을 단단하게 다지고, 이를 바탕으로 장애와 비장애의 벽을 깨뜨리며 지역사회와 지속해서 연대하겠다는 '내실 다지기()'의 성격이 강한 문장입니다. 주민들이 단순한 봉사 단체를 넘어 전문 교육인으로서 도약하고자 하는 열망이 클 때 훌륭한 나침반이 되어 줍니다. 제2안은 연대와 공동체 가치 지향형 비전(역량강화 제외형)으로, "경계를 넘어 함께 존중하고, 지속 가능한 활동으로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꿈꾸는 그림책"입니다. 내부적인 준비 과정의 단어를 걷어내는 대신, 외부로 향하는 '존중', '장벽 완화', '따뜻한 세상'이라는 가치를 직관적이고 감성적으로 전면에 내세운 '사회적 실천()' 지향형 문장입니다. 발달장애 어린이와 수평적으로 연대하고 소통하며 활동의 확산 자체에 무게중심을 두고 싶을 때 매우 적합한 안입니다. 이제 주민들은 이 두 가지 안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참조하여 자신들의 호흡에 맞는 최종 안을 또 한 번 주도적으로 재구성 또는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실천적 증거: 주민이 비전을 세운 국내외 사례

이처럼 주민 스스로 조직의 비전과 목적을 수립하는 과정이 현장에서 얼마나 강력한 신뢰도와 생명력을 발휘하는지는 국내외의 명확한 실천 사례를 통해 증명됩니다.

 

[국내 사례] 성동구 마장동 주민자치회의 '마을 비전 및 계획 수립' 서울시 성동구 마장동 주민자치회는 주민들이 직접 마을의 사명과 비전을 도출해 낸 대표적인 국내 성공 사례입니다. 과거 관 주도의 일방적인 비전제시와 사업 방법 전달 방식에서 벗어나, 마장동 주민들은 수개월에 걸쳐 아파트 단지, 전통시장, 골목길 등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주민 모둠을 구성하고 피라미드 토론과 주민총회를 결합한 비전 수립 워크숍을 진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행정이 정해준 목적이 아닌, 주민들의 토론을 통해 "정 가득하고 살기 좋은 마장마을"이라는 비전과 그에 따른 세부 실천 의제들을 직접 확정했습니다. 주민 스스로 수립한 비전이기에 사업 추진 과정에서 주민 참여도가 높았으며, 복지관과 주민자치 조직 간의 이상적인 민관 협력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출처: 서울시 주민자치 활성화 우수사례집 및 성동구 마장동 주민자치회 운영 성과 보고서 (2021)

[해외 사례] 미국 포틀랜드의 '이웃 연합 프로그램' 주민 주도 시정의 메카로 불리는 미국 오레곤주 포틀랜드시의 이웃 연합 모임들은 스티븐 코비의 '끝을 시작하며 행동하라'는 원칙을 제도적으로 구현하고 있습니다. 이곳의 사회복지사들과 지역 공동체 촉진자들()은 주민들에게 특정 복지 프로그램이나 목적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대신 주민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우리 동네의 가장 취약한 문제(예: 발달장애인 이동권, 고립 가구 정서 지원 등)를 정의하고, '카드 브레인스토밍'과 같은 집단지성 도구를 활용해 이웃 연합만의 독자적인 '사명 선언문()'을 주민 스스로 작성하게 돕습니다. 포틀랜드 주민들은 이 사명 선언문을 바탕으로 시 정부에 예산을 주도적으로 요구하고 집행하며,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끈끈한 주민 자치와 마을 복지의 생태계를 유지해 오고 있습니다. https://www.southportlandna.org 

  • 출처: 포틀랜드 시정부 시민참여국(Office of Community & Civic Life) 연례 보고서 및 지역 공동체 활성화 실천 사례 연구

 

 

South Portland Neighborhood Association (Oregon)

South Portland Oregon Neighborhood Association includes Lair Hill, South Waterfront, Johns Landing

www.southportlandna.org

리더의 과제: 사다리를 놓기 전 벽을 보라

주민들이 사다리를 향해 달려가게 만들기 전에, 그 사다리가 기대어 있는 방향이 올바른지 주민들과 함께 멈춰 서서 질문을 던지십시오. 장애인종합복지관 주민동아리의 주민들이 가치 카드를 통해 빚어낸 비전의 문장들처럼, 주민들의 다소 서툰 언어 속에 숨겨진 공동체의 열망을 믿으셔야 합니다. 조금은 빈틈이 있더라도 스스로 춤추고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주인공으로 역할하시도록 마당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주민 스스로 목적지를 정하고 키를 잡는 순간, 마을을 향해 전진하는 그 배의 항해는 멈추지 않는 지속 가능한 기적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