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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활동

통통통 부천 꿈의학교 러시아 연해주 기행(17년 8월2일에서.....)_후반부

강정모 소장 2017. 8. 29. 22:39

이제 후반부로 접어들었습니다. 러시아 연해주의 날씨는 내내 습했습니다. 북방이라서 서늘할 줄 알았지만 일년중 짧은 더위는 무덥기는 한국이나 여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우수리스크에는 고려인이 많이 거주합니다. 강제이주로 뿔뿔히 흩어졌던 고려인들은 소련의 해체로 인해 또다시 의도치 않은 혼란을 겪게 됩니다. 거주지가 소련에서 다양한 독립국으로 정치지형이 변경됨에 따라 다시 연해주로 돌아옵니다. 또 다시 난민과 같은 신세가 된 셈이었습니다. 이러한 질곡속에서도 꿋꿋히 우수리스크에 정착하여 삶을 일구었습니다. 


첫번째 사진은 최재형 기념관입니다. 최.재.형 이 이름 석자는 우리나라 역사에 그렇게 유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최재형은 우리나라독립운동사에 길이길이 남을 헌신과 업적이 있는 분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이 분을 기념하여 최재형장학회가 있습니다. (사)동북아평화연대와 함께 하다가 지금은 독립하여 별도의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최재형 선생은 노비출신입니다. 노비출신으로서 조선에 대한 서러움과 원망이 있을법도 하지만 사업가로서 큰 성공을 거두고, 많은 자금을 나라의 독립을 위해 씁니다. 이 집은 최재형 선생이 마지막까지 살았던 집입니다. 일제가 독립운동가들과 조선인들을 말살하기 위해 거점을 공략할 때 최재형 선생은 피신하지 않고, 이 집에서 끌려나와 일제의 손에 죽게 됩니다. 


그리고 아래의 기차역은 라즈돌로니예 기차역입니다. 이 곳에서 고려인들은 영문도 모르고 80년전 강제이주길에 오릅니다. 어딘지도모르는 곳에 한달동안의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실려 황무지에 뿌려집니다. 그 설움과 아픔의 장소가 이 곳입니다. 이 곳에서 참여자들과 청소년들은 먼저간 동포들을 추모하며 추모사를 읆었습니다. 


그리고 크라스키노에 도착하여 유니베라(남양알로에) 연해주지사에 짐을 부리고, 단지동맹유적비를 들어갔습니다. 안중근 지사외 12명은 이 곳에서 결사대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왼손 검지끝을 자르는 동맹을 하였습니다. 이를 기념하여 단지동맹비를 세웠습니다. 안중근 의사만의 트레이드 마크였다고 생각했는데 그 외에도 12명이 단지결사대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국과 북한, 러시아를 관통하는 철길 위에서 사진한컷 찍었습니다. 한 쪽으로는 갈 수 없는 곳. 다시 갈 날을 꿈꿉니다. 그리고 유니베라 숙소에서 마지막 날을 보내며 청소년들은 꿈을 담아 연을 띄웠습니다. 전날 연을 만드는 프로그램을 가졌는데, 중고등학생들은 연을 난생처음 만들어본다네요. 당연히 사무국장과 저는 연 재료만 주면 만들줄 알았는데, 초등학생이나 유치원생들처럼 사무국장과 저는 일일히 가르쳐주어야 했습니다. 이이이이런!!!! 나는 초등학교 시절 연만들어 날리는것이 놀이였으나 지금 청소년들은 연이 무언지도 몰랐습니다. 만드는 것도 모르는데 날리는 건 더더욱 난망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어릴적 실력을 발휘하여 문화조 청소년들의 연을 멋지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가오리와 방패연을 만들어주었죠. 연해주의 시원한 바람을 따라 점으로 보이도록 하늘높이 띄워주었습니다. 자신의 꿈이 씌어진 연들이 하늘높이 떠있는 순간에 청소년들의 표정은너무나 행복해보였습니다. 자기가 떠 있는것 같다며 신기해했습니다. 중고등학생들이 이까짓 연에 저렇게 좋아하다니..... 청소년 전문가라고 떠들고 다니는 저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청소년들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소회가 들었지만 더 정리해야 할 듯 합니다. 나의 아이들도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발해성터 발굴현장으로 들어갔습니다. 현재 발해의 중심지였던 염주성 발굴은 러시아와 대한민국이 합작으로 성터유물 발굴작업이 한참이었습니다. 끝없이 펼쳐지는 연해주 초원 한복판에 있던 발해성터는 현재는 황무지중에 황무지입니다. 밖에서 볼 때야 저 푸른 초원위에라는 노래가 생각나지만 그 곳으로 들어갈 때는 '녹색지옥'입니다. 억센모기떼와 소피를 빠는 등에가 들어가자마자 포식을 위해 우리에게 끝없이 달려듭니다. 습함과 더불어 많은 벌레떼들의 공격을 헤치고 인솔자와 청소년들은 발해성터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발국작업을 하는 학자들의 얼굴에는 개척자들의 아우라를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 황무지가 발해라는 나라의 중심지였고, 그 곳에서 먹고, 자고, 놀고, 사랑하고, 웃고, 떠들고, 싸우고, 울고, 사고, 팔았던 곳이었다니 시간의 허망함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이제 여정을 접을 때가 왔습니다. 

그.러.나

이게 왠일입니까!!! 귀국 당일 크라스키노에서 블라디보스토크는 4시간 거리입니다. 오전일찍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으로 나섰으나 전날 비가 엄청나게 내려 도로와 교량이 끊기고, 유실되어 반쯤 갔다가 더 이상 못가고, 고립되었습니다. 우리는 망연자실해 있으며, 도로고립을 피하기 위해 다시 유니베라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부천 교육청과 청소년 학부모들은 걱정에 안 되는 통신을 겨우겨우 잡아 소통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여행단장인 부천 상도중학교 교장선생님은 불안한 학생들을 안심시키고, 인솔자들은 매 시간 대책에 고심하였습니다. 지역구 의원과 단체와 연관된 국회의원실을 연결하여 영사관에 소식을 넣으며 대책에 부심했습니다. 이런 일을 당하고나서야 알게 된 것은 대한민국 영사관은 이런 일에 거의 도움이 안 되고, 우리보다도 정보가 취약하다는 것입니다. 욕안먹을 정도의 의례적 뒷북 문자나 날리는 행태에 외교부의 적폐가 이만저만 아님을 실감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틀간의 기약없는 기다림끝에 급작스럽게 길과 교량이 임시복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소식이 통보되자마자 10분만에 풀었던 짐을 꾸려 출발하였습니다. 다른 때엔 1시간도 넘게 걸렸던 청소년들의 행동이 급한 상황에 닥치니 일사분란하게 10분만에 집결하는 모습을 보고,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영상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험난한 탈출길을 겨우겨우 빠져나와 우수리스크에 당도하였고, 임시거처인 우수리스크문화예술대학 기숙사에서 하룻밤을 보낸후 다음날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 도착하였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의미는 동방을 지배하다라는 뜻이랍니다. 좀 거만한 지명입니다. 맨 밑에 사진은 공항스넥점에 써 있는 우리말입니다. "당신의 국수를 수집" 가는날 잠시 웃음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5박6일을 계획했으나 7박8일이 된 여정이 끝났습니다. 무엇보다도 청소년들이 한 명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귀국하여 돌아갔다는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인솔자이자 주관단체 이사로서 수행한 이번 프로젝트는 이사라는 위치가 제대로 하려면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드는지 체험한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