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學習)의 의미가 배우고 익힘이다. 배운다는 뜻은 (아이를)배다, (냄새를)베게하다와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 익힘의 의미인 습(習)은 어린 새가 날기 위해 날갯짓의 연습을 하여 의식하지 않고도 행위가 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즉 습관이 되도록 노력한다는 의미다. 민주주의라는 제도와 운영원리를 자동차에 비유하면 민주주의를 학습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인 면허증을 따는 것이다. 면허만 딴다고 바로 운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동적 반사작용이 일어나도록 운전연습이 필요하다. 몇 년에 한 번씩 적성검사로 차와 운전에 대한 각성과 환기도 있어야 한다. 사람은 학습을 통해 의식이 성장한다. 의식이 성장하기 위해서 학습은 입체적이어야 한다. 첫째는 운영원리의 지적습득이다. 둘째는 운영원리에 대한 사유와 토론이다. 공자는 논어 위정편에서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 즉 배움만 있고, 생각이 없으면 공허하고, 반대라면 위태롭다(맹목적이다)라며 학(學)과 사(思)의 긴밀한 관계를 언급하였다. 셋째는 경험이다. 배우고 생각하여 영근 무엇을 일상에서 구현해보는 것이다. 경험은 90%의 실패와 10%의 성취를 낳는다. 그것은 화학작용을 하여 지혜라는 결을 만든다. 지혜는 개인적이든, 공동체적이든 경험이 아니면 형성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반복이다. 반복은 지루하다. 의식의 성장은 마지막 반복에서 일어난다. 마치 정상을 앞둔 등반가의 고통과 유사하다. 성장은 계단식으로 일어나는데 처음에는 노력한 만큼 성장이 일어나다가 어느 지점에서 권태와 지루함이 지속되는 시점이 발생한다. 마치 무풍지대인 적도로 배가 들어간 것처럼 노력해도 제자리인 시기가 오는 것이다. 이 때 포기하게 만드는 지점은 노력해도 제자리, 노력하지 않아도 제자리인 점이다. 노력하지 않아도 제자리는 경각심도 흐릿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계점에 도달하기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비약적 성장을 한다. 그러다가 그 수준에서 다음 수준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유사한 제자리의 시간이 찾아온다. 어떤 것이든 성장은 반드시 지적습득, 생각과 토론, 경험, 반복훈련이라는 네 가지 과정을 거쳐서 일어난다. 네 가지 과정을 거친 성장은 비가역적이다. 즉 퇴보하지 않는다. 퇴보는 네 가지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았을 때 발생한다. 운동선수나 조직들간에 기량 차이가 나는 원리와 같다. 기량이 쳐지는 선수가 갑작스럽게 기량을 끌어올리기 위해 약물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약발이 떨어지면 기량은 원점으로 퇴보한다. 하지만 네 단계를 제대로 밟으면 기량의 퇴보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처럼 민주주의적 운영역량은 단기간에 성장하지 않는다. 민주시민교육은 개인을 세우는 자유의 가치와, 조직을 통합하는 공화의 가치를 넘어 속한 공동체에 대한 비판과 자기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하데 목적이 있다. 한 집단의 이데올로기는 개인과 공동체를 세우고, 통합할 수 있지만 개인과 공동체가 원칙에 입각하여 움직이고 있는지 알기 힘들다. 밖에서 자신을 관찰하는 능력 즉 비판과 성찰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스스로 옳다고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체제다. 반대로 스스로 옳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체제가 독재다. 민주주의는 어떠한 사상이 개인과 조직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객관화 역량’을 형성시켜야 지속가능하다. 다양한 생각과 입장이 공존하지만 평화적 공존을 위해 지켜야할 공공선이 무엇이며, 그것을 합리적으로 도출하도록 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영국의 교육학자인 데이비드 힉스(David Hicks)는 지식/정보, 가치/태도, 기술/방법이라는 교육의 세 가지 측면을 제시하였는데 이 기준으로 보면 현재 그나마 진행 중인 민주시민교육, 시민참여교육은 매우 지식/정보적 측면에 치우쳐있다. 그래서 어렵고 재미없다는게 참여자들 대부분의 평가다. 그래서 평생학습관계자들도 과목설계에서 주저하게 된다. 시민참여영역이 보완되어야 할 부분은 현장 역량이다. 우리 일상에 유용성과 절박한 질문에 응답하는 시민참여 교육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평생학습에서 시민의 의미와 참여의 의미를 낯설게, 다시 봐야할 필요가 있다.
내가 시민교육현장에서 참여자들에게 제시하는 두 번째 질문은 ‘국민과 시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이다.참여자들은 흥미롭게 논의하다가 금새 어려워한다. 그리고 네이버 지식검색을 누르곤 한다. 참여자들의 생각을 들어보면 대개 지역적 개념을 이야기 한다. 국가에 구성원으로서 국민, 시(市)의 구성원으로서 시민을 이야기한다. 그러면 군(郡)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시민이 아니게 된다. 물론 주체적, 권한, 참여, 능동, 주권의식 등등의 이야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좀 다른 차원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나라를 선택한 사람은 누구인가?’ 물론 대한민국은 이 질문이 점점 이상한 질문이 아닌 시대로 가고 있다. 대한민국을 선택한 참여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참여자들은 그냥 태어났지 선택한 사람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성장하면서 점점 ‘선택’의 기로앞에 던져진다. 이과를 갈지, 문과를 갈지, 대학을 갈지말지, 어느 과를 갈지, 어느 동아리를 갈지, 어느 친구를 사귈지, 결혼을 할지말지, 어떤 사람과 결혼할지, 어느 직업을 선택할지, 어디에서 살지 등등 우리는 죽을 때까지 선택해야 한다. 즉 우리의 현재는 ‘선택’의 산물이다. 즉 시민이란 ‘내가 내린 선택(選擇)으로 구성된 존재’인 것이다. 선택이 어렵고, 엄중한 것은 그에 따른 책임(責任)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 내린 선택에 책임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즉 시민을 다시 정의하면 ‘스스로 내린 선택으로 내가 자신을 만들며, 그에 대해 책임지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또 다른 질문은 그렇다면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은 가볍다. 나라, 성별,피부색, 태어난 지역, 부모, 가문, 성씨, 선천장애 등이다. 그런데 사회적인 대부분의 차별과 편견은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는가? 바로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것에서 이뤄지고 있다’ 즉 사회적 편견과 차별은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것을 책임지라는 것이다.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가? 이것을 간파한 사람이 바로 현대 미국의 시민권 도약의 불꽃이었던 마틴 루터 킹이다. 그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중에서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가 있다. ‘선택’이라는 관점에서 ‘내 아이들이 자신들이 선택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받지 않고, 자신들이 선택하여 형성해 온 인격을 기준으로 평가받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으로 재해석 할 수도 있다. 시민을 지역이 아니라 의미적 관점에서 재개념화하면 ‘선택하지 않은 것을 평가하는 사회’일수록 시민사회가 아니며 ‘선택한 것으로 평가하는 사회’를 확산하는 것이 평생학습에서 시민참여교육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다시 정리하면 자신이 선택한 것으로 평가받는 형성된 존재가 시민이고, 선택한 것으로 평가받는 사회일수록 성숙한 시민사회이며, 성숙한 시민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 갈등, 협력, 연대하는 방법을 확산하는 활동이 평생학습의 시민참여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지점은 평생학습 6진분류표를 연구개발한 동의대학교 김진화 교수의 의견과 궤를 함께 한다. 그가 수원시평생학습관에서 2013년 6진 분류표 개발관련 인터뷰 내용을 보면 평생학습 6진분류는 현재 평생학습에서 실시하는 내용들의 기계적 분류의 산물이 아니라 한 인간의 성장과정속에서 자아실현의 완성된 시민이 되기 위한 체계의 산물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6진분류는 기초문해-학력보완-직업능력-문화예술-인문교양-시민참여로 분류되어 있다. 김진화 교수도 이것은 나열식 분류이기보다는 순차적, 철학적 의미로 해석되고, 적용되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러한 궤적속에서 하나씩 해석해보고자 한다. 언어는 사회로 들어가는 열쇠라는 비유가 있다. 우리는 언어로 구성된 세계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해외여행을 가면 즉시 체감한다. 특히 영어권 국가가 아닌 나라로 해외여행을 갔을 때 더 잘 체감한다. 나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행을 우연히 놓친 경험이 있다. 전화도 로밍을 하지 않았다. 주민들은 조금도 영어를 하지 못했다. 어떤 의사소통도 할 수 없었다. 갑자기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고, 어릴적 엄마 손을 놓쳐 길을 잃었을때의 감정이 저 밑바닥에서 찌르르 흘렀으며, 심지어 35년전 그 시절 낯설고,불길한 냄새까지도 느껴졌다. 즉 기초문해는 단순한 글읽기의 차원이 아니다. 공동체에 진입하느냐 못하느냐의 결정적 계기다. 세대차이라는 것도 나이보다는 그 세대의 특징적 언어를 얼마나 이해하고, 내 목소리로 발음하고, 활용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한국사회는 다문화 시대를 맞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기초문해는 사회적 차원이다. 두번째 학력보완이다. 일단 학력은 공교육에서 쌓고, 기른다. 그 과정에서 미진한 부분이 생긴다. 이것을 어디서 보완해야 하는가? 역시 공교육이다. 평생학습은 헌법가치다. 헌법 31조 5항과 6항은 평생교육을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대한민국이 학력보완이 사교육에 너무 집중되어 있다는 것에 있다. 학력보완의 사적영역 편중은 사회적 불평등의 심각한 원인이다. 학력보완의 공적영역의 확대는 국가 공동체의 통합과 불평등 해소의 중요한 영역이다. 세번째 생애적 차원에서 학력향상을 통해 직업을 수행할 역량을 기르게 된다. 직업능력의 함양은 인간존재의 중요한 과정인 ‘독립’에 있다. 독립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경제적 독립이며, 두번째는 정서적 독립이다. 경제적 독립은 정서적 독립에 우선한다. 왜냐하면 경제적으로 독립할 때 정서적으로 독립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 물론 경제적으로 독립하였으나 정서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사람도 많다 - 독립하지 못할 때 생기는 감정은 ‘비루함’이다. 민주주의는 독립된 시민들로 구성되어 운영하는 체제다. ‘독립된 시민’이란 일차적으로 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 책임져야 하는 존재다. 그런데 경제적 독립이 안 되면 시민으로서 출발부터 좌절된다. 그런 의미에서 직업능력의 영역은 취업기능향상이라는 측면뿐만 아니라 내 선택의 계약주체가 아니라 의존심리와 의존상태가 고착된 백성이나 국민의 차원으로 내려가지 않도록 하는 목적 위에서 기능해야 한다. 네번째 문화예술은 경제적 독립이 되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자존적 주체로 서기 시작한다. 자신을 느끼고,자각하고자 하는 욕구가 발현되기 시작한다. 인간의 고유한 영역인 상상력의 고양을 추구하고자 한다. 상상력과 영감을 제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문화와 예술의 음미다. 인간은 문화예술의 음미를 통해 공감과 연대, 감정이 정화와 미래의 희망을 구상한다. 즉 인간 됨의 존재감을 경험하게 된다. 사람은 문화예술로 고양된 경험을 나누고 싶어한다. 그래서 함께 경험한 사람들과 자신의 감정, 상상력, 희망을 나눈다. 이 때 무엇으로 나눌까? 나누는 매개체가 무엇인가? 바로 언어다. 여기서 다섯번째 인문교양이 필요하다. 인문교양은 문학, 역사, 철학의 지식을 많이 쌓는 것이 아니다. 평생학습으로서 인문교양은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기능해야 한다. 인문(人文)의 문자적 의미는 ‘사람이 그리는 무늬’다. 노숙자에게 인문학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한 <희망의 인문학>의 저자 얼 쇼리스는 인문학의 목적을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설명할 언어를 찾는 과정이다’라고 했다. 내 자신의 삶, 느낌, 생각을 명료하고, 풍성한 언어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했을 때 고양되는 심리는 ‘자존감’이다. ‘자기존중감’이다. 즉 정서적 독립이다. 자신을 자신에게 자신이 설명해내지 못하면 자신을 다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버린다. 그 때 내 자신은 소외된다. 그 때 고양되는 심리는 ‘자존심’이다. 나는 내 자신의 평가의 주체에서 나는 다른 사람이 내리는 평가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경제적 독립을 이뤘지만 정서적 독립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면 교양(敎養)은 무엇인가? 문재인 대통령이 세월호 동조단식을 하면서 읽었던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의 저자 파커팔머는 교양을 영어로 하면 'liberal arts'인데 그 책에서 교양을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이라고 환기해주었다. 무엇에서 자유로워져야 하는가? 일차적으로 자신을 모르는 무지와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은 무엇이고, 자신이 선택한 것은 무엇인지,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이고,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그러므로 책임져야 하는 것은 무엇이며,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것은 무엇인지를 구별하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인문교양을 ‘나의 삶에 우러나는 생각과 느낌을 타인에게 명료하게 설명할 언어를 발견하여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을 배우는 과정’으로 재해석해본다. 그러므로 평생학습의 인문교양은 일차적으로 글읽기와 글쓰기가 되어야 한다. 평생학습에서 문사철(文史哲)은 인문교양의 목적이 아니라 소재, 수단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인문교양으로 높은 자존감으로 자유롭게 된 존재는 비로소 내 자신을 너머 타인과 세계에 관심을 갖고 타자(他者)가 나와 분리된 것이 아니라 나와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한다. 여기에서 마지막 단계인 평생학습에서 시민참여가 필요하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시민참여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투표다. 즉 평생학습으로서 시민참여 교육은 투표에 대한 가치함양, 지식, 투표를 잘 하는 역량을 배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투표를 어떻게 해야 잘 할까? 대통령, 국회의원, 지자체장들의 신분은 공무원이다. 정확하게는 비정규 공무원이다. 대통령은 5년짜리 비정규 공무원, 국회의원과 지자체장은 4년짜리 비정규 공무원이다. 고용주는 ‘시민’이다. 그렇다면 회사에서 직원을 채용할 때 어떻게 하는지를 생각해보면 된다. 그리고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 어떻게 하는지를 생각해보면 된다. 아무렇게 막 채용하고, 막 고르는지 않는다. 그런자를 우리는 ‘호구 또는 호갱’이라고 한다. 내 회사에 채용과 내 물건의 소비를 위해 우리가 치르는 시간과 노력만큼 과연 투표에 치르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채용과 소비보다 더 고도의 지식과 역량을 요구하는 것이 투표다. 두번째 시민참여는‘자원봉사’이다. 자발성, 공익성, 무보수성, 책임성의 4가지 가치 위에 기능하는 것이 자원봉사활동이다.자원봉사활동의 유용성과 철학은 이 발제문의 논지를 넘어가기에 생략하지만 그 유용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 발제문에서 제안하고 싶은 것은 평생학습은 자원봉사활동과 만남이다. 이제 평생학습계와 자원봉사계는 만날때가 되었다. 평생학습을 통해 고양된 존재는 지역으로 들어가 행동으로 변화의 주체가 되고자 하나 그 참여과정이 녹록하지 않다. 반대로 자원봉사를 통해 시민적 구성원이 된 존재는 지역과 이슈와 사회적 소수자 문제에 더 알고 싶은 욕구가 있으나 그것을 별도로 학습하는 과정이 역시 만만치 않다. 학습노하우와 활동노하우가 승승을 이뤄야 한다. 그 접점이 바로 평생학습에서 ‘시민참여’의 영역이다. 현재 평생학습은 인문교양이나 문화예술에서 비중이 높게 나오고, 시민참여 부분은 1-2% 내외의 비중으로 진행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평생학습으로 시민참여의 개념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하는지 명료하게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과목의 사례를 제시해보면 헌법읽고, 쓰기(캘리그래피로 좋은 글귀 쓰듯), 헌법포캣북 만들기, 나눠주기, 읽기 캠페인, 정치참여방법, 정당가입절차방법, 토의토론방법, 의제설정방법, 주민조직방법, 투표, 선거참여, 시위기획방법, 효과적이고, 평화로운, 전략적인 시위방법, 저항방법, 언론참여, 캠페인 조직, 자원봉사 기획방법, 마을강사단 양성조직, 국회, 지방의회(의원) 견학 활용법, 법원(재판관) 활용법, 헌법재판소 견학, 정부부처 활용방법, 동사무소 활용방법 등이 있겠다.
나는 2000년대 초반 평화교육으로 출발하여 그 과정에서 민주시민교육 방법론을 습득하여 지금까지 지역과 단체와 같은 다양한 현장에서 적용할 수 있도록 콘텐츠를 제작하고, 가공하는 사람이다. 14년간 국내외의 다양한 평화적 소통기법과 민주주의 학습방법들의 자료를 모으고, 분류하고, 가공하였다. 그런데 이처럼 민주주의적 방법론이 프로그램으로 도입되다보니 실제 현장의 이슈를 담아내고, 민주적 합의를 도출하는데 작동하지 못하고, 파급력도 떨어진다. 즉 방법을 안다는 사람이나 조직은 있는데 그걸 내 문제에 적용해서 효과를 봤다는 사람이나 조직은 드물다. 심지어 교육이나 행사 프로그램에 재미를 위한 스팟(SPOT) 차원으로 알고 있는 경우도 많다. 민주주의적 소통 방법을 다루고, 보급하는 NGO와 평생학습센터 등의 기관들도 보급 콘텐츠와 프로그램은 최신이지만 정작 자기 조직운영은 그것을 적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내 자신도 그렇다. 많은 방법론을 알아도 가족내에서 이견(異見)과 갈등(葛藤)을 다룰 때 제대로 방법을 적용한 경우가 별로 없다. 일단 번거롭고, 익숙하지 않다. 그리고 어색하다. 남들에게는 그렇게 능수능란한 컨설팅을 하면서 정작 내 가족의 문제엔 그렇게 어색할 수 없다. 문화적 낯섬은 민주주의가 일상화가 되는데 두터운 장벽이다. 개인도 그런데 조직은 훨씬 더할 것이다. 성남시의 평생교육 중 시민참여 영역은 일상에서 민주주의적 방법을 적용한 다양한 시행착오의 스토리를 축적시도를 제안하고 싶다. 예를 들면 피라미드 토의, 토킹스틱 의사소통, 브레인스토밍(라이팅), 거리두기, 모서리토론, 터부토론과 같은 일상에서 적용이 쉬운 것을 기관장 이하 직원들의 조직운영에 다양하게 시도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시도동기, 어색함, 준비, 실행, 불편함, 다시 원래하던 대로 돌아가고 싶은 저항, 반전,놀라운 경험과 성과, 시너지 등이 축적되고, 기록되는 것이다. 시도되어 나온 성과만큼 꾸준하고 정직하게 성남의 다른 기관과 커뮤니티에 공유된다면 문화적 낯섬이라는 장벽을 돌파한 사례를 형성하는 것이다. 장유유서(長幼有序)에 대한 양명학적 해석은 독특하다. 서(序)는 질서, 차례라는 뜻이지만 담, 벽이라는 의미도 있다. 그래서 장벽을 돌파하고 넘어선 자가 진정한 어른이자 장(長)이라고 해석한다. 민주주의의 일상화라는 즉 민주주의 남 얘기가 아닌 나의 민주주의 이야기를 만드는 담과 벽을 넘는 의미있는 도전이 요청된다. 이런 시도들이 경험담이 되고, 간증(干證)이 될 때 자신감이 섞어져 감동을 주는 사례와 지혜가 된다. 성남시 평생학습의 민주주의적 자기 스토리가 형성되고 축적되어 공유되면 성남시 평생학습이 지역에 구축한 촘촘한 네트워크를 타고 들어가게 될 것이다. 방법론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내 문제에 적용한 방법적용사례다. 내가 이것에 대해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는 것도 내 가족의 문제와 조직의 문제에 토킹스틱을 적용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지적장애를 갖고 있는 동생의 삶과 진로문제로 부모와 나와 아내는 심각한 갈등과 소통의 단절을 겪었다. 가족이라는 특수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해묵은 감정의 발로가 소통 엉킴의 주원인이지만 민주시민교육 전문가로서 갈등을 복기해보니 부모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끝까지 듣지 않고, 서로의 말을 중간에 자르고, 중심주제와 관련 없는 얘기를 하게 되는 빈도가 높았다. 그래서 토킹스틱을 시도해보았다. 토킹스틱은 스틱을 가진 사람만이 발언을 할 수 있다. 스틱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중간에 끼어들 수 없다. 시간제한은 없다. 스틱은 토킹스틱의 원조격인 인디언들 것처럼 멋지고, 의미 있는 것일수록 좋다. 진지해지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시도 자체에 소진되어 물컵을 스틱 대용으로 삼았었다. 물컵같이 흔한 것으로 하니 부모는 빈번히 컵을 잡는 걸 무시하였다. 아마 독실한 기독교인인 부모에게 예수가 고통스러워하는 모형이 달린 십자가를 토킹스틱으로 삼았다면 사뭇 분위기가 달랐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처럼 당시를 회상하면 할 얘기가 많다. 이러한 얘기들이 모두 스토리이다. 스토리는 현장에서 나온다. 민주적 소통방법이 적용되는 일상은 모두 민주주의의 생생한 현장이다. 민주시민교육 방법론의 일상적 적용은 "두번째 민주화운동"이다. 군부독재를 종식하고, 제도적 민주주의를 세워서 민주주의가 완성되지 않는다. 어쩌면 정치에 대한 무력감, 비효용성, 개인의 삶과 무연관성은 독재보다 더 큰 장벽일지도 모른다. 부두노동자로 평생을 살아간 거리의 철학자 에릭호퍼는 그의 책 <맹신자들>에서 불만에 찌든 사람들이 아니라 희망에 부푼 사람들이 행동한다고 하였다. 헌법 제1조가 흔들릴 뻔했던 대한민국은 아마도 ‘민주화가 되면 뭐하나 그 놈이나 저 놈이나 똑같네’와 ‘민주화가 되면 뭐하나 내 삶이 달라진 게 별로 없는데’라는 절망들이 쌓여 나온 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다시는 헌정질서가 유린되는 일이 없으려면 일상에서 피어난 민주주의의 희망, 효능감을 만들고, 쌓아야 한다. 성남시 평생학습이 민주시민역량들이 우리네 구체적 삶에 적용되어 효능감과 변화를 가져오는 일상의 민주주의를 일구는 지렛대가 되길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