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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콩나물시루]

성취감을 제대로 맛보려면

강정모 소장 2017. 11. 25. 09:17

 

인간이 살아야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행복이다. 이건 많은 종교가 말하고 있지만 헌법정신(헌법제10조)이기도 하다. 한 때 대한민국은 멀쩡히 헌법을 두고서도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구절을 별도로 달달외우며 고통스럽게 자신이 태어난 이유를 주어삼켰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다. 인간은 그런 거창한 생각을 가지고 잉태하지 않는다. 역사, 사명같은 단어를 떠올려서는 순간적으로 폭발하는 뜨거운 사랑이 어렵다. 우리는 그럼 왜 태어났는가? 슬플것도, 허망할것도 없다. 누구나 그냥 태어났다. 이유는 없다. '그냥....'이 진실이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냥'으로 살 수 없다. 의식을 품고있는 톡특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를 만들었다. 살아야하는 이유를 설정해야하기 때문이다. 이유 설정의 효율적인 방법은 '신'을 창조하는 것이다. 내 삶의 의미를 위해 인간은 신을 창조했다.

 

그러나 종교에서 말하는 삶의 이유는 민족중흥보다 버겁다. 신의나라를 확장한다느니, 모든 나라에 신의 뜻을 전파하기위해라느니 아마도 종교창시자가 부활한데도 손사래를 칠 것같다. 차라리 민족중흥이 가볍다.

 

우리는 내 삶의 이유를 '그냥'과 '민족, 세계, 우주'라는 양극단 중간에서 내가 감당할만한 것을 내 머리, 내 가슴, 내 몸으로 찾아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거창해서 감당하기 힘들고 맞지않은것들이 내 의지여부와 관계없이 끼어들어 인생이 자꾸만 버거워진다.

 

'그냥'과 '세계중흥' 사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일 만한것이 바로 '행복'이다. 법관련자들은 헌법정신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모르겠지만 "국민행복증진"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하여튼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사는것이다. 그런데 이게 단순하지 않다.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따져야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행복의 길 중에 하나는 "성취감"이 있다.

 

사전에 나와있는 성취감의 뜻은 '목적한 바를 이루어서 느끼는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느낌'이다. 성취감은 작용방식이 성적쾌감과 유사하다. 짜릿하지만 오래가지 않는다. 점점 큰 자극을 갈구하게 된다. 성취감이 휘발되지 않고, 내 삶에 켜켜이 베어들어가 오랫동안 작동하게 하려면 주의해야할 점이 있다.

 

인간의 성취는 두 가지가 엮여 직조된다. 하나는 개인의지다. 두번째는 외적도움이다. 개인의지만으로 이룬것같은 착각을 "오만"이라 하고, 외적도움만으로 성취한듯 판단하는 것을 "무시"라고 한다. 두 가지가 적절히 교직되어 이뤄진 성취와 성취감일수록 휘발성이 적고, 자양분이 된다.

 

그러나 잘 배합된 성취가 내는 성취감은 음미하기 쉽지않다. '외적도움'이라는 통제권밖의 변수 때문이다. 누구는 외적도움이 결핍되고, 누구는 넘친다. 현실은 평등하지 않다. 외적도움의 결핍은 삶을 방어적이고, 경직되게 한다. 외적도움의 과함은 불안과 의존을 준다. 즉 성취를 하지만 온전히 내 것이 아니기에 성취앞에 선 또 다른 나는 떳떳하지 못하고, 눈치를 보게된다.

 

그러므로 외적도움이라는 통제권 밖의 에너지를 통제권 안으로 넣어 다루기 위해서는 '용기'가 등장해야한다. 외적도움의 결핍앞에서는 타인에게 도움을 구하는 자기사랑의 용기가 외적도움의 과잉앞에서는 거절할 수 있는 자존의 용기가 요청되어야 한다. 용기는 성취감을 제대로 길어 행복에 이르게하는 바가지다.

 

자꾸만 주폭이 반복된다며 괴롭다는 젊은 재벌3세는 그의 주변환경인 재벌2세 부모나, 피해자들인 변호사들을 볼 때 이 참에 용기를 길어보기엔 열악한 환경일듯 싶다. 이번엔 괴로움에서 홀가분해지고 싶다면 '낯선곳'으로 들어가야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