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한 사명을 넘어 '그냥'이라는 진실로
인간이 살아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전적으로 '행복'에 있습니다. 이는 여러 종교의 가르침이자 대한민국 헌법 제10조가 보장하는 기본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때 우리는 헌법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구절을 주문처럼 외우며 개인이 태어난 이유를 국가적 과업 아래 억지로 구겨 넣어야 했던 시절을 지나왔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명확합니다. 우리는 어떤 거창한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기획된 존재가 아닙니다. 생명이 잉태되는 순간의 그 뜨겁고 원초적인 사랑 속에 '역사'나 '사명' 같은 무거운 단어가 끼어들 자리는 없습니다. 우리가 태어난 이유는 실로 담백합니다. 슬퍼하거나 허망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누구나 그저 태어난 것일 뿐, '그냥'이라는 두 글자가 생명의 가장 정직한 출발점입니다.
신을 창조한 인간, 그리고 감당 가능한 행복의 크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냥' 살아가기 힘든 존재입니다. 고도의 의식을 지닌 인간은 삶의 궤적에 의미라는 이정표를 세우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종교를 만들고, 살아야 할 이유를 설정하기 위해 '신'이라는 존재를 창조했습니다. 내 삶의 막막한 여백을 채우기 위해 신이라는 거대한 서사를 도입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종교가 제시하는 삶의 이유는 때로 '민족중흥'보다 더 버겁습니다. 신의 나라를 확장하고 온 세상에 뜻을 전파해야 한다는 선포 앞에서는, 아마 종교의 창시자가 다시 돌아온다 해도 손사래를 칠지 모릅니다. 우리는 '무의미한 그냥'과 '거대한 세계 구원'이라는 양극단 사이에서, 내 머리와 가슴, 그리고 몸이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 중간지대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타인이 설계한 거창한 가치들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삶에 침범하여, 인생은 끊임없이 무겁고 버거워질 뿐입니다.
휘발되지 않는 성취감의 조건: 오만과 무시 사이에서
그 양극단의 간극을 메워줄 가장 보편적인 대안이 바로 '행복'입니다. 법률가들이 헌법 정신을 어떻게 정의하든, 결국 국가의 존재 이유는 '국민 행복의 증진'이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하지만 행복은 단순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지속적으로 물어야 합니다. 그 수많은 행복의 길 중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바로 '성취감'입니다. 사전적 의미의 성취감은 '목적한 바를 이루었을 때 느끼는 뿌듯한 감정'이지만, 그 작동 방식은 성적 쾌감과 닮아 있습니다. 강렬하고 짜릿하지만 찰나에 불과하며,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큰 자극을 원하게 만듭니다. 이 성취감이 허무하게 휘발되지 않고 삶의 결을 만드는 자양분이 되게 하려면, 성취의 구조를 이해해야 합니다. 성취는 '개인의 의지'와 '외적 도움'이라는 두 가닥의 실로 직조됩니다. 자신의 노력만으로 다 이루었다는 착각은 '오만'을 낳고, 오로지 운이나 배경 덕분이라 치부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무시'가 됩니다. 이 두 요소가 적절히 교직될 때, 성취감은 비로소 깊은 맛을 냅니다.

통제 밖의 변수를 다스리는 힘, '용기'
문제는 이 적절한 배합을 음미하기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는 점입니다. '외적 도움'이라는 변수는 우리의 통제권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도움이 턱없이 부족해 삶이 방어적이고 경직되며, 누군가는 도움이 지나쳐 불안과 의존의 늪에 빠집니다. 결핍과 과잉 사이에서 성취는 빛이 바래고, "온전히 내 힘으로 해냈다"는 떳떳함을 잃은 채 타인의 눈치를 살피는 위축된 자아만 남게 됩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바로 '용기'입니다.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에너지를 내 삶의 통제권 안으로 끌어들이는 도구가 바로 용기이기 때문입니다. 도움이 부족할 때는 타인에게 손을 내밀 줄 아는 '자기 사랑의 용기'가 필요하고, 도움이 과잉될 때는 단호히 거절할 줄 아는 '자존의 용기'가 요청됩니다. 용기는 성취라는 깊은 우물에서 행복이라는 맑은 물을 길어 올리는 두레박과 같습니다.
익숙한 결핍과 과잉을 넘어, '낯선 곳'으로 걸어갈 때
우리의 삶이 자꾸만 어긋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되는 이유는, 때로 나를 둘러싼 환경이 '용기'라는 두레박을 사용하기에 너무도 고착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만성적인 결핍 속에 방치되어 있고, 누군가는 지나친 외적 간섭과 보호 아래 자신의 의지를 상실한 채 살아갑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오롯이 내 힘으로 일궈낸 진정한 성취감을 맛보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만약 삶의 무게에서 진정으로 홀가분해지고 싶다면, 나를 정의하던 모든 익숙한 관계와 환경을 뒤로하고 스스로 '낯선 곳'을 선택해야 합니다. 타인의 시선과 고정관념이 닿지 않는 그 낯선 고립 속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외부의 소음을 끄고 자신의 순수한 의지와 대면할 수 있습니다. 그곳은 고독하지만, 동시에 나를 지키는 법과 도움을 구하는 법을 배우는 '건강한 용기'의 연습장이 됩니다. 결국 치유와 성장은 내가 나를 가장 잘 아는 곳이 아닌, 나조차 나를 모르는 낯선 길 위에서 비로소 시작됩니다.
낯선 곳으로 나아갈 때 시작되는 치유
반복되는 주폭과 기행으로 괴로워하는 어느 재벌 3세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를 둘러싼 재벌 2세 부모나 이해관계로 얽힌 주변인들은 그가 '용기'라는 두레박을 사용하기에 너무도 열악하고 고착화된 환경일지 모릅니다. 과잉된 외적 도움과 왜곡된 시선 속에서 진정한 성취감을 맛보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만약 그가 진심으로 삶의 무게에서 홀가분해지고 싶다면, 자신을 정의하던 모든 익숙한 것들을 뒤로하고 '낯선 곳'으로 걸어 들어가야 합니다. 그 낯선 고립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의지를 마주하고, 건강한 용기를 연습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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