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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콩나물시루]

청춘(靑春)의 길

강정모 소장 2018. 3. 3. 08:12

 

우리는 마찰이 없는 미끄러운 얼음판으로 들어섰다.

어떤 의미에서 그 조건은 이상적인 것이었지만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걸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마찰이 필요하다.

거친 땅으로 되돌아가자!

 

- 비트겐슈타인-

 

유남규, 안재형이 탁구붐을 일으켰을때 내 또래 학생들은 탁구채를 구입하는게 유행이었다. 탁구대가 흔하지 않았고, 사설 탁구장을 가기엔 주머니 사정이 넉넉치 않았다. 그래서 학교 노천교실에 있는 탁자에 가운데 작대기 하나놓고 가방에서 고이 간직한 탁구채를 꺼내어 똑딱놀이를 하곤했다. 나는 운동신경이 없어 탁구붐에 또래들과 많이 어울리지는 못했지만 다른 운동에 비해 오래했던 놀이였다.

 

가끔 친구들끼리 돈모아 탁구장을 가면 어느 시간이든 탁구영웅을 만날수 있었다. 영웅의 공통점은 여느 라켓과 다른 수비형 라켓을 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의 스매싱과 드라이브는 지금도 눈에 선하다. 운이 좋으면 탁구영웅들이 팁을 알려주기도 했다. 백서브, 스핀, 커트의 '요령'을 한껏 자랑한다. 우리는 그들이 넣는 휙휙 도는 공을 단한번도 넘기지 못하고, 부러움에 넋을 잃곤 했다.

 

다음날부터 나는 노천교실에서 그 때 본 서브를 열심히 연습했다. 십분쯤 지나면 서브흉내족들은 '우리'가 된다. 네트를 넘기는 실력이 되면 다른 동네에 가서 한판붙었다. 서브하나로 또래들을 제압해버렸다. 그러면 그 동네 녀석들도 그 동네 영웅들에게 서브 요령을 배워와 도전을 한다. 한 녀석은 노천교실 시멘트 탁자에서 스카이서비스(?)를 하는 신기술을 배워서 우리를 제압해버렸다. 그런과정을 통해 이동네, 저동네 또래 스핀서비스왕이 탄생했다. 그 왕은 전설이 되어가고 있었다.

 

탁구장에서 탁구레슨을 운영하곤 했는데 거기에 다니는 한 가냘픈 여학생이 있었다. 추리닝을 입은 학생이다. '그 왕'과 똘마니들은 그 학생을 불러 시멘트 탁구대에서 한판 해보자고 했다. '그 왕'은 광이 나는 탁구채를 가방에서 꺼냈다. 여학생은 무표정한 얼굴로 한 똘마니에게 구린 탁구채를 빌렸다. '그 왕'의 잔뜩 스핀먹은 백서브를 받으려면 깊은 각도의 컷트를 쳐서 넘겨야 한다. 그런데 이게 왠일! 허망하리만치 평범한 넘김~~ 그 왕은 소금기둥이 되었다. 두번째 비장의 무기 스카이서비스 역시 평범하디 평범한 넘김~~ 그 왕은 영패의 수모를 얻었고, 얼마안가 노천교실의 탁구족은 사라졌다. 물론 탁구 똘마니였던 나도 노천교실을 떠났다.

 

그 사건은 나에게 '요령'은 결코 '기본'을 이길수 없음을 각인시켰다. 중학시절을 보내고, 고3 수험시절엔 각인된 원칙에 눈감고 요령의 대세를 쫓아갈수 밖에 없었다. 현재가 과중하고, 미래가 각박하면 요령이 솟구친다. 하지만 요령은 위기는 넘기게 하나 존재를 마르고, 앙상하게 한다. 기본위에 요령은 재미를 주지만 기본없는 요령은 왜소함과 초췌함을 가져온다.

 

청춘은 요령이나 팁을 습득하는 시기가 아니다. 거칠지만 기본을 닦기 위해 관계와 세계로 두려움없이 질주하는 때다. 거친땅에서 간간히 얻는 성취,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행착오 모두 기본을 닦는 원료들이다. 그러나 기본을 향한 질주는 현재와 미래의 긴장이 탄성한계를 넘어서서는 들어가기 어렵다. 여지없는 사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청춘들은 환경의 탄성한계를 넘어선지 오래다. 그래서 온통 멘토들이(그 중에 나도 하나다) 제공하는 요령과 팁 심지어 팁중에 팁인 '꿀팁'으로 둘러싸여 있다. 기본은 맛없고, 딱딱하다. 그걸 내 이와 내 혀로 씹어 소화시켜야 한다.

 

날 것을 함께 씹어먹는 것, 같이 배아프고, 이아픔을 공유하는 것. 이것이 오늘날 청춘과 관계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