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을 만드는 세포의 사멸, 진화의 전제조건
태아의 손가락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경이롭습니다. 처음에는 오리발처럼 붙어 있던 세포들이 '아포토시스'라는 자기 사멸 신호를 받아 스스로 사라집니다. 그 비워진 공간 덕분에 인간은 도구를 잡고 글을 쓰는 정교한 손을 갖게 됩니다. 나무가 겨울을 나기 위해 낙엽을 떨어뜨리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이처럼 성장을 넘어선 성숙과 진화는 반드시 '제때 사라져주는 세포들'을 필요로 합니다. 만약 사멸해야 할 세포가 이기적으로 생존을 고집하며 무한 증식한다면, 그것은 생명을 위협하는 '암'이 됩니다.
조직의 암세포가 되는 ‘과잉된 사명’과 ‘비대해진 비전’
비영리 단체 내의 갈등도 이 메커니즘의 고장에서 시작됩니다. 사명이 비전보다 과열되면 조직은 과거의 영광에 갇힌 보수적 집단이 됩니다. "우리가 원래 하던 방식"만을 고집하며 타 단체와 배타적 경쟁을 벌이고, 내부에서는 뒷담화가 무성해집니다. 반대로 비전만 비대해지면 유행하는 공모 사업에만 매달리게 됩니다. 구성원들은 "우리가 왜 이 일을 하는가"라는 회의감에 빠지고, 조직은 외부 권력과 재정에 쉽게 휘둘립니다. 건강한 조직은 현재의 익숙한 사업과 비대해진 자존심을 과감히 덜어내는 '전략적 사멸'을 통해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실전 사례: 10년 차 ‘스타 활동가’의 아름다운 퇴장
실제로 한 시민단체에서 10년 넘게 특정 지역 현안을 주도해 온 A 국장의 사례를 보겠습니다. 그는 탁월한 유능함으로 모든 성과를 독점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자리를 지킬수록 후배 활동가들은 단순 실행자로 전락했고, 조직의 창의성은 고갈되었습니다. 뒤늦게 문제를 깨달은 A 국장은 자신의 주도권을 내려놓는 '조직적 아포토시스'를 단행했습니다. 의사결정권을 팀원들에게 위임하고 자신은 '질문하는 촉진자'로 물러났습니다. 그러자 고사 직전이던 조직에 생기가 돌았고, 젊은 활동가들의 감각이 더해져 사회적 영향력(Social Impact)이 이전보다 3배 이상 커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팀장의 존재이유는 ‘성취’가 아닌 ‘임파워먼트’
21세기는 효율이 아닌 효과의 시대입니다. 일 잘하는 팀장이 모든 것을 해결하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팀장의 진짜 역할은 본인이 빛나는 것이 아니라, 팀원들이 '일'을 넘어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팀장이 직접 뛰며 모든 성과를 움켜쥐려 할 때, 팀원들의 열정은 사멸합니다. 리더는 자신의 권한을 위임하고, 지식과 경험을 전수하며, 끊임없는 질문으로 팀원들을 세워야 합니다. 내가 사라짐으로써 팀원이 살아나는 메커니즘, 그것이 비영리 조직의 지속 가능한 생명력을 만드는 핵심입니다.
불멸이 아닌 유한성에서 피어나는 신뢰
비영리 단체의 신뢰도는 '우리가 영원히 존재해야 한다'는 집착이 아니라, '우리의 성과는 유한하며 다음 세대를 위해 기꺼이 자리를 내어줄 수 있다'는 태도에서 나옵니다. 자기 성과의 불멸을 추구하는 조직은 결국 고인 물이 되어 썩기 마련입니다. 스스로를 파괴하여 더 큰 생명을 살리는 아포토시스 메커니즘이 필요합니다. 주인공일 때가 있고, 조연으로 때로는 물러남으로 위치를 바꿔도 슬퍼하지 않는 순환이 필요합니다. 그때 비로소 조직은 고민만 거듭하는 상태를 벗어나, 세상을 바꾸는 건강한 손과 발을 갖게 될 것입니다.
'연구소칼럼[콩나물시루]'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내 삶의 의미를 내가 만드는 존재는 곧 시민 (0) | 2017.11.25 |
|---|---|
| 세상의 중심을 포기해야 어른이 된다 (0) | 2017.10.28 |
| 자녀에 대한 최고의 사랑은 자녀에게 배움 (0) | 2017.10.25 |
| Art of Choice : 리더의 책임 (0) | 2017.10.23 |
| '나에게 말걸기' 부활의 시작 (생존과 의사소통) (0) | 2016.0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