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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콩나물시루]

[리더십+조직운영] 도전과 자기제한의 균형

강정모 소장 2019. 1. 27. 13:44

 

http://kids.donga.com/?ptype=article&no=20201102242008

(사진출처)

 

에피소드1-1.

벼룩의 자기 제한

 

 

자신의 몸길이보다 수십~수백 배 거리를 가볍게 도약하는 벼룩. 자연계 최고의 높이뛰기 선수인 벼룩의 점프 노하우는 그동안 과학계의 미스터리였다....벼룩은 몸길이가 2~4밖에 되지 않지만 높이로는 최고 18, 너비로는 33까지 뛰는 자연계 최고의 도약선수다.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2/21/2011022102456.html 정보출처)

 

벼룩 몇 마리를 빈 어항에 넣는다. 어항의 운두는 벼룩들이 충분히 뛰어넘을 수 있는 높이다. 그 다음에는 어항의 아가리를 막기 위해서, 유리판을 올려놓는다. 벼룩들은 톡톡 튀어 올라 유리판에 부딪친다. 그러다가 자꾸 부딪쳐서 아프니까 유리판 바로 밑까지만 올라가도록 도약을 조절한다. 한 시간쯤 지나면 단 한마리의 벼룩도 유리판에 부딪치지 않는다. 모두가 천장에 닿을락 말락하는 높이까지만 튀어오르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유리판을 치워도 벼룩들은 마치 어항이 여전히 막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계속 제한된 높이로 튀어오른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상상력 사전 p108>

 

 

 

에피소드 1-2.

코이 물고기 성장

 

일본에 가면 '코이'라는 물고기가 있다. 이 물고기는 작은 수족관에 넣어 두면 7cm 정도 자란다. 하지만 이 물고기를 좀 더 넓은 수족관으로 옮기면 자신의 이동거리가 넓어진 것을 알아차리고 몸의 길이도 14cm가량 커진다. 하지만 코이 물고기를 강물에 놓아 두면 몸의 길이가 100cm를 훌쩍 넘을 정도로 성장한다.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과 환경에 따라 성장이 달라지는 것이다.

 

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wanleo&logNo=220123781810&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kr%2F

(사진 및 정보출처)

 

 

 

https://www.indiehackers.com/@princely/5912e4904f(사진출처)

 

에피소드 2. 

언제 게임을 멈출지 아는 것_능력의 범위

 

버핏은 능력의 범위(circle of competence)’를 제시했다. “능력의 범위를 알고, 그 안에 머물러라. 범위의 크기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범위의 경계를 아는 것이다.”, 멍거는 당신의 재능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 능력의 범위 밖에서 행복을 추구하면 성공할 수 없다.”, IBM설립자 톰 왓슨은 나는 천재가 아니다. 똑똑한 부분이 있고, 일관성 있게 그 주변에만 머무를 따름이다.”

 

직업도 자신의 능력의 범위에 집중하면 금전적인 열매를 맺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감정적인 열매도 얻을 수 있다. 능력의 범위를 명확히 그어놓으면, 매력적이긴 하지만 자신에게 적합하지 않은 제안을 거스르기가 쉬워진다. 중요한 것은 능력의 범위를 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경쟁이나, 게임 그리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언제 그것을 그만둬야 할지를 알아야 한다. 자신의 능력의 범위를 벗어나게 만들 상대를 파악하고 그만둬야 한다. 능력의 범위를 넘어서게 하는 것 외에 또 하나의 강력한 유혹은 능력의 범위를 넓히라는 주변의 부추김이다. 기존의 점 위에서 꽤 잘하고 있어서 자신감이 넘칠 때 이런 유혹이 크다. 그러나 범위를 확장하지 말라. 능력은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그리 쉽게 옮겨지지 않는다.

 

능력의 범위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형성될까? 심취함, 덕질이다. 심취는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기까지 필요한 수천 시간을 투자하게 한다. 한 분야에 빠지는 것이 능력의 엔진이다. 이렇게 심취하는 것의 반대는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다지 흥미가 없는 것이다. 능력의 범위가 왜 그리 강력한 개념인가? 최고 수준의 전문가는 괜찮은전문가보다 천 배는 더 빠르게 문제를 해결한다. 능력의 범위 안과 밖은 하늘과 땅 차이다.

 

인생을 계획할 수 있다는 믿음은 환상이다. 태풍이 휘몰아치는게 인생이지만 오직 한 곳만 부드러운 바람이 분다. 그 장소가 능력의 범위안이다. 그 곳이라고 물결이 아주 잔잔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안전한 항해가 가능하다. 능력의 범위 안에서 초점의 오류, 사고의 오류를 넘어설 수 있다. 그리고 이 안에서 위험을 무릎쓰고, 기존의 것을 넘어설 수 있다. 이 범위 안에서 지혜와 경륜이 축적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면에서 평균이상인지 이하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최소한 한 가지 면에서 평균을 훨씬 웃도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만큼은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으면 된다. 뛰어난 것 한 가지가 못하는 것 천 가지를 상쇄한다. 능력의 범위 안에서 들이는 매 시간은 범위를 벗어나서 들이는 시간보다 천 배는 더 가치가 있다.

 

<불행 피하기 기술영리하게 인생을 움직이는 52가지 비밀롤프 도벨리 지음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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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룩과 코이 물고기에 관한 에피소드는 신자유주의 물결이 거세게 불었던 2000년대에 리더십 강의에서 예화로 자주 인용되던 에피소드다. 신자유주의 부작용이 심각한 요즘은 성공 또는 리더십 강의도 많이 줄어들었다. 그래서 '야망을 가져라, 큰 물에서 놀아라, 더 큰 목표를 향해 도전하라'는 사회적 메시지도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하지 만 벼룩과 코이 물고기의 에피소드는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이 많다. 예화가 주는 메시지처럼 자신의 가능성을 향상시키고, 더 큰 도전을 통해 자신을 계발하여, 활동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은 인생에 중요한 과업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의 시장중심주의, 무한경쟁, 상대평가 광풍이 휩쓸면서 불평등과 부정의가 창궐하였다. 그에 따른 심각한 공동체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찬양했던 시장중심주의, 규모확장, 무한증식, 승자독식, 성공지상주의는 지속가능한 공동체를 파괴할 뿐이다. 이와 중에 버핏이 제안한 능력의 범위(circle of competence)는 신자유주의가 찬양한 가치들에 대한 회의 가운데 재발견한 지혜일지도 모른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능력의 범위'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준 인물을 꼽으라면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을 개발하여 안랩이라는 회사를 설립후 크게 성공시켜, 본받을만한 경영리더이자, 토크 콘서트로 젊은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안철수씨가 아닐까 한다. 승자독식구조에 신음하는 청년들의 희망이었던 안철수씨는 자신이 성공했던 아이티와 과학 영역에서 정치라는 범위로 확장하여 진출했다가 현재 대부분 실패함으로써 이전의 호감과 신뢰 자산까지 날린 상태다.

 

그런 그는 호감, 신뢰자산을 날려버리지 않을수 있었다. 첫번째 2013년 대통령 후보 단일화에서 양보했을 때, 두번째는 2017년 대통령 선거 낙선후였다. 두번의 기회마다 그는 좀 더 진지하게 자신의 '능력의 범위'를 검토하고, 숙고 해야했음에도 불구하고,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몰랐던 위험지대였던 정치영역인 당대표 출마, 보수당과 합당시도, 서울시장 출마(3등 낙선 등) 능력의 범위를 넘어서는 게임을 그만두지 못하고 말았다. 그는 정치라는 '위험지대'에 계속 머무름으로써 이전의 사회적 자산을 잃었다.

 

우리는 벼룩과 코이물고기의 '도전'과 버핏의 '능력의 범위'라는 자기제한의 메시지를 동시에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인생은 길기 때문이다. 10~30대에는 벼룩과 코이물고기의 메시지처럼 자기제한을 넘어서는 도전으로 다양한 자신의 가능성을 '알아야' 한다. 무엇을 잘 하고, 무엇을 좋아하며, 무엇을 흥미로워하고, 어떤 사람과 팀워크가 잘 되는지, 어떤 분위기에 설레고, 어떤 이슈에 몰입되는지, 갈등시 어떤 방어를 하고, 어떻게 해야 벗어나는지를 '알아야' 한다. 벼룩과 코이물고기 메시지는 자신의 가능성을 '무한확장하라'는 메시지 보다는 자신의 가능성이 '무엇인지 알아라'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야 한다.

 

10~30대의 세계란 현실 세계든, 경제적 세계든, 정신세계든 기껏해야 부모와 가족들이 구성해놓은 범위일 가능성이 많다. 정신분석가 라캉은 "내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고 했다.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열망하는 것은 실제로 부모들이 원하는 것일뿐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가진 능력과 가능성도 부모가 좋아하는 능력을 계발해온 것일 뿐이다. 그래서 젊은 시절에는 부모나 교사가 구성해놓은 물적, 정신적 세계를 넘어서, 경계밖으로 나가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내 다리로, 내 팔로, 내 몸과 정신세계로 온전히 서볼 수 있다. 그래야 비로소 내 인생을 사는 것이다. 내 인생을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마음대로 해보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구성하고, 선택해봐야 책임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선택하고 책임지는 존재가 "시민"이다. '국민'은 태어나지만 '시민'(내 선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40대이후에는 "능력의 범위"를 설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오래전에 버스를 타고 가다. 차창밖으로 건축현장을 보게 되었는데, 건축현장의 크레인에 "진로건설"이라고 쓰여져 있는 것을 본적이 있다. 속으로 '진로는 소주회사 아닌가? 소주만드는 회사가 왠 건설을 하지?'라는 의문을 가질 즈음 들려온 소식은 진로그룹은 결국 외환위기에 부도를 맞고, 여러 회생절차를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그룹 회장은 해외에서 도피생활을 하다 몇 년전 60대 초반의 나이에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현재의 진로소주(참이슬) 회사는 없어지고, 다른 경쟁회사에 인수되어 이름만 남게 되었다. 그 회사가 소주를 중심으로 ''이라는 능력의 범위안에 머물렀다면 지금 ()진로는 어떻게 되었을까? 위에서 언급한 안철수씨와 ()진로 사례 이외에도 능력의 범위를 넘어서 위험지대에 머무르다. 가진 것마저도 모두 날려버리는 사례는 너무 많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에서부터 장삼이사들의 수많은 사건까지 우리는 넘치는 남의 얘기를 가지고 있고,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크고 작은 성공뒤에 왜 능력의 범위에 머무르지 못하고, 그 밖을 나가려고 안달하는 걸까?

 

젊은 시절에는 튼튼하고, 아름다운 육체가 있지만 내면을 지배하는 감정은 두려움과 불안이다. 반면에 중년이후에는 체력은 노쇠해지고, 힘들어지지만 내면의 주감정은 욕심이다. 그래서 젊은 시절에는 기득권들이 설정해놓은 경계를 넘어가기 위해 도전하고, 저항하고, 탐색하는데 주저하게 되고, 중년이후에는 멈추고, 한계를 담담하게 받아들여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젊은 시절 도전하고, 성공 뒤 중년에는 자기 능력의 범위에서 겸손하고, 꾸준한 길을 걷는 훌륭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드물다.

 

이것은 개인뿐만 아니라 비영리 조직도 마찬가지다. 초기 조직은 비전을 확장하고, 수정하며 많은 도전을 해야한다. 도전하면서 조직의 가능성, 역량, 적합성, 강점과 약점을 파악해나가게 된다. 그러나 궤도에 올라 어느 정도 자리매김한후에는 비전보다는 사명에 집중해야 한다. 조직의 설립목적에 머물러, 변화시켜야 할 것들에 집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점차 그 비영리조직은 온갖 잘 되는 것을 해대는 그냥 조직이 되고, 그게 비영리 조직인지, 먹고살기 위한 회사인지 구분이 어렵게 된다.

 

80~90년에에 청소년기를 겪은 세대들은 국어는 한샘, 영어는 성문, 수학은 정석 시리즈로 공부했다. 특히 기초영문법으로부터 시작되는 성문시리즈에 대표적 암기문구는 "Boys, be ambitious!" '젊은이여! 야망을 가져라'였다. 그 야망은 묘하게 은유적으로 받아들여져서 누구나 시작은 서울, 연고대를 꿈꾸라는 메시지로 여겨지며, 청소년기의 입시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그러나 그 서막을 열었던 성문시리즈의 "Boys, be ambitious!"의 원문은 이렇다.

 

Boys, be ambitious!

Be ambitious not for money or for selfish aggrandizement,

not for that evanescent thing which men call fame.

Be ambitious for the attainment of all that a man ought to be.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돈을 위해서도 말고 이기적인 성취를 위해서도 말고,

사람들이 명성이라 부르는 덧없는 것을 위해서도 말고

단지 인간이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얻기 위해서...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1826~1886) 삿포로 농학교 초대교감이 학교를 떠나며 남긴 말>

 

우리가 받아들였던 그 "야망"과는 전혀 다른 메시지이다.

 

젊은이는 야망을 가져야 한다. '자신이 누군지 아는' 야망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알고 나서 세월의 성과들이 쌓인 중년이 되거나 중견조직이 되면 현재를 받아들이고, 머물러야 한다. 하지만 그 때에도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는 모르는 것'으로 벗어나게 되면 지금까지 쌓아온 돈, 성취, 명성 모두 날려버릴 가능성이 있다. 아마도 안철수씨는 50이 넘어서도 자신이 누군지 아는 공부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공부를 위한 비용이 너무 비쌌다. 그러나 감옥에 들어간 두 전직 대통령들에 비해선 저렴한 값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