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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콩나물시루]

[리더십+번아웃] 실패가 썩으면 ‘쓰레기’가 되고, 발효되면 ‘지혜’가 된다.

강정모 소장 2019. 1. 27. 20:24

 

https://brunch.co.kr/@sweetway/237(사진출처)

 

 

비행기의 창문은 왜 모두 둥글까?

 

영국의 <드 하빌랜드 코메트 1>은 세계 최초의 제트여객기 기종이었다. 그런데 1953~1954년 잇달아 공중폭발사고가 났다. 공항추락, 횡단폭발, 바다추락의 사고에서 생존자는 없었다. 이 비행기는 비행금지처분을 받았으나 사고원인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비행금지가 해제되었으나 또 사고가 났다. 그래서 최종폐기 되었다.

 

조사된 최종 추락원인은 사각형의 창문이었다. 비행기는 높은 고도를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는데 이 피로도가 쌓여 사각형 창문 모서리에 균열이 생겨 몸통으로 번져 기체가 동강이 났던 것이다. 오늘날 비행기 창문이 모두 둥근 것은 이 사고이후다. 그런데 이 사고를 통해 얻은 항공산업의 주요성과는 사고에도 파손되지 않고 보존되는 비행기록 장치 개발이다. 이 장치가 바로 블랙박스.

 

항공산업만큼 실수를 중대하게 받아들이는 분야는 없을 것이다. 허드슨강에 불시착시킨 체슬리 슐렌버거 기장은 항공분야의 모든 지식, 모든 규칙, 모든 절차는 누군가 어디선가 추락했기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했다. 모든 추락은 미래의 비행을 더 안전하게 만들어준다.

 

추락한 주식, 마이너스 통장, 실수로 보낸 이메일, , 이혼, 파산, 해고, 가족의 사고 등은 당신이 그것들에 어떤 감정과 태도를 갖고 있는지 전혀 관심이 없다. 당신이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든 당신이 어떤 감정이든, 세상은 관심 없다. 버트란트 러셀은 자기기만에서 벗어나는 것은 안정되고, 지속적인 행복의 꼭 필요한 전제조건이다.”라고 했다.

 

현실이 바람직할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다. 하지만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이라도 받아들여야 한다. 탐탁치 않은 현실일 때는 특히 그렇다. 러셀은 여기에서 또 조언한다. “계속해서 성공하지 못하는 극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쓸데없지는 않은지 생각해봐야 한다.”라고, 외국어에 재능이 없는데 거기에 매달리고 있지 않은지, 경영자로서 소질이 없거나, 운동에 소질이 없거나 등 이런 가능성들을 생각해보고 수정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결핍, 실패, 추락을 수용할 수 있을까? 자기 자신만 바라보면 잘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보다 타인을 더 많이, 더 정확하게, 더 명료하게 본다. 그래서 자신에게 실망하는 경우보다 다른 사람에게 실망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실수한 원인을 설명할 수 없으면 세상이나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추락의 원인을 설명하지 못하면 다시 추락하게 된다. 그러므로 실패가 자산이 되려면, 실패가 지혜로 전환되려면 집요한 분석이 필요하다.

 

먼저 현실을 받아들여라, 탐탁치 않은 부분을 수용해야 한다. 지금 당장 힘들어도 나중에 후회하지 않는다. 삶은 쉽지 않다. 좋은 삶이란 많은 실패를 수용하고, 수정하는 과정이다. 간혹 추락하는 것은 괜찮다. 중요한 것은 추락의 원인을 알고, 다음에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불행피하기 기술, 롤프 도벨리> p34 일부 각색 및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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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버섯을 먹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우리 조상들이 독버섯을 먹고 많이 죽었기 때문이다. 조상들의 시행착오 덕에 우리는 버섯이라는 좋은 음식을 즐길수 있는 것이다. 현재의 편리함과 풍요로움은 모두 조상들의 실패와 시행착오라는 값을 치룬 덕분이다. 실패(failure)는 다른 말로 시행착오(trial and error)라고 하며, 시행착오(trial and error)가 쌓여 만들어지는게 지혜(wisdom)이고, 지혜가 축적되어야 창조(creation)가 발생한다.

 

하지만 실패와 시행착오가 잘 지혜와 창조로 연결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실패와 시행착오에 성찰(省察, Reflection)라는 에너지가 투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실패와 시행착오를 그냥 두면 썪어 쓰레기가 된다. 하지만 실패와 시행착오에 성찰이라는 에너지를 뿌리면 발효되어 지혜와 창조가 된다. 음식물을 썪이느냐, 발효시키느냐는 같은 원리지만 그 결과물은 천지차이다.

 

하지만 성찰(省察, reflection)은 얻기 어렵다. 성찰은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자신의 감각기관으로 자신을 보고, 듣고, 사유해야 발생한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을 보지 못한다. ? 우리의 신체구조는 타자(他者)를 보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육안으로 볼 수 없다. 가능하려면 눈알을 빼서 돌려봐야 한다. 즉 우리는 평생 우리 육안으로 우리를 직접 볼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남이 어떤 걸 했는지, 잘했는지 못했는지, 틀린지 맞는지, 옳은지 그른지는 잘 보이지만 내 모습은 잘 보지못한다.

 

남을 남보듯하는 것을 객관적(客觀的) 태도라고 한다. 반면에 나를 나 보듯하는 태도를 주관적(主觀的) 태도라고 한다. 성찰(省察), 회개(悔改), 메타노이아(방향전환), 전환(轉換), 반성(反省) 등과 같은 개념은 나를 남 보듯하는 태도일 때라야 가능하다. 그래서 어렵다. 어렵기도 하고, 수치심과, 치욕감을 일으켜 오래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겪은 대부분의 실패와 시행착오는 쓰레기가 된다.

 

개인과 조직이 실패와 시행착오를 했는가? 그 순간은 위기다. 위기(危機)는 위험과 기회가 공존하는 순간이다. 실패와 시행착오라는 재료가 우리앞에 주어진 것이다. 재료는 그냥 재료일 뿐이다. 이것을 어떻게 하느냐는 우리에게 달렸다. 실패와 시행착오라는 재료가 주어졌을 때 그것에 성찰을 뿌리려면 무언가를 해서는 안 된다. 가만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게 어디서, 어떻게, 왜 우리앞에 왔는지 추적해야 한다. 그 모양, 소리, 질감은 어떤 종류인지 관찰해야 한다. 추후에 어디에 쓸모가 있을지 생각하고, 토의해야 한다. 그러나 실패와 시행착오가 쓰레기가 되는 경우는 무언가를 자꾸 하는 것이다. 성찰없는 계속적인 행동이다. 인간은 합리적 동물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합리화하는 동물이다. 실패와 시행착오가 닥쳤을 때 우리 뇌는 자기책임으로 수용하기 보다는 타자(他者)의 원인으로 합리화 하고, 수치심과 치욕이라는 기분을 털어낸다. 그리고 똑같은 행위를 반복한다. 이것은 용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서 나오는 행위일 뿐이다.

 

나와 우리를 관찰하는 힘. 이것이 우리를 오랫동안 행복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