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연구소 소장이자 프리랜서 강사다. 직업 특성상 2/4, 4/4분기에 일이 많다. 그리고 1, 2월은 한 해의 활동을 준비하기 위한 삶을 산다. 사놓고 못 읽은 책을 읽고, 쌓인 콘텐츠를 살펴 살만 발라 저장해두기도 하고, 새로운 해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이리저리 궁리도 하고, 일하느라 관리 못한 뱃살을 빼기 위해 걷기도 하고, 만나고 싶으나 급하지 않은 관계에 연결되는 일 등을 하고 보낸다. 이런 행동들은 모두 불안이라는 끈적거리는 감정을 씻어내기 위한 몸부림의 일종이기도 하다.
합정역 인근에서 작년에 마무리 하지 못한 일을 마치고, 간 김에 인근에 근무하는 전 직장 후배와 저녁식사를 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중 시간을 보낼 곳을 두리번거리는데 마침 중고서점이 눈에 들어와 들어갔다. 대형 인터넷 서점의 오프 중고서적 매장에 호기심이 나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내가 중고, 대학시절에 자주 찾던 중고서점을 생각하며 들어갔는데, 적잖이 실망했다. 깔끔한 매장과 정렬된 도서비치에 비해 도서량이 적었다. 그러나 나는 책을 구입할 목적이 아니라 시간을 때우기 위해 갔기 때문에 구경하는 심정으로 후배를 기다렸다.
구경하는 중에 들어온 책이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였다. 이 책은 출판된지 20년 이상이 된 고전의 반열에 가까와지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 몇 번을 사서 읽으려고, 개인 구매 리스트에 늘 기록되어 있던 책이기도 했으나 지금까지 못 읽었다. 바쁘지 않은 이 때, 저렴하고, 깨끗하기도 한 이 책을 지금 아니면 못 읽을 것 같아 집어들고, 매대에서 결재하였다. 귀가후 밤에 한 아이의 얼굴에 눈물이 흙먼지를 씻고 내려가는 표지의 인상적인 이 책을 폈다. 나는 비교적 독서속도가 느리고, 내용에 쉽게 몰입하지 못하는 편이나 이 책 서문의 한 문장으로 인하여 책 구덩에 머리를 쳐박고, 몸까지 빨려들어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저자인 장 지글러는 2016년판 서문에서 "기아 희생자들과 우리를 갈라놓는 것은 단지 출생의 우연뿐이다"라고 기술하였다. 이 문장은 날카로운 꼬챙이 같아서 마치 내 코를 꿰뚫는듯한 느낌이었고, 그 문장이 나에게 주는 통증과 불편감, 묘한 카타르시스로 인해 계속 페이지를 넘기게 하였고, 그 날로 책 한 권을 모두 읽게 하였다. 완독후 다시 표지를 보았다. 흙먼지로 범벅되어 아래를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굶주린 아이를 응시하였다. 그 아이의 얼굴속에 내 어린 시절의 얼굴이 겹쳐졌고, 내 아이들의 눈물, 흙먼지, 굶주림, 절망의 표정으로 표지가 편집되었다.
표지의 아이와 나의 차이는 출생의 우연뿐이며, 표지의 아이와 내 아이들의 차이도 출생의 우연뿐이다. 표지의 아이는 자신의 삶을 선택하지 않았다. 선택만이 책임과 연결된다. 편견과 차별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을 책임지라고 하는 것이다. 문명화된다는 것은 인간이 의식과 의지를 가지고 선택한 것으로 평가받는 사회를 만드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출생의 우연'이 삶을 지배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민주화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는 출생의 우연을 고착시키는 독재를 타도하기 위해 인류는 처절한 노력으로 눈부신 민주적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지금은 민주적 성과라는 고속도로를 타고, 무자비한 독재자 대신 깔끔하고 부드러운 외양으로 치장한 '금융자본'이 달리고 있다. 이 책은 세계의 구석구석을 핥으며, 인류의 절반이 굶주리더라도 자신의 배는 터지도록 먹어대는 무서운 괴물인 '금융자본'의 속살을 고발한 책이다. 특히 남미 칠레의 '아옌데',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의 '상카라'의 개혁을 '금융자본'과 결탁한 서방의 탐욕적 무력이 얼마나 사람들을 비열하게 파괴하는지 고발하는 내용은 분노와 서글픔으로 이글거리게 하였다.
그래도 희망을 걸 수 있는 것은 민주주의다. 2차대전후 극적으로 합의한 '우리가 그래도 인간이어야 하지 않은가?!'라는 합의인 <세계인권선언>을 바탕으로한 민주주의를 밀고 가야 한다. 민주주의의 성과를 교활한 '금융자본'이 활용하고 있다고 해도, 민주주의만이 금융자본과 얽힌 폭력을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EBS 다큐프라임 <민주주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82~84년 아프리카 대기근 시기에 이디오피아는 1백만명 이상의 아사자를 내었으나 같은 대기근을 겪은 보츠와나의 아사자는 '0명'이었다. 곡물생산량에서 오히려 이디오피아는 보츠와나 보다 2배 가까운 생산량을 거두었음에도 비참한 기아를 초래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디오피아와 보츠와나의 차이는 무엇이었는가?
이디오피아 당시 대통령은 군부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멩기스투 마리암 대통령의 독재정권이었으며, 국민총생산(GNP)의 46% 군사비로 지출하였고, 84년 곡물가격은 300% 폭등하여, 돈있는 사람들의 차익을 위한 사재기가 심각하였다. 즉 곡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국민들이 곡물을 구입할 수 없어서 대기근을 초래했음을 고발하고 있다. 반면에 보츠와나는 196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민주국가이며(75~05년 평균GNP성장률 5.9%, 2010년 민주주의 지수 28위, 대한민국 75~05 평균 GNP성장률 6%, 2015년 민주주의지수 22위) 84년 대기근 당시 정부는 취약계층에게 직접 식량을 배분하였고, 대규모 일자리를 공급하여 국민들의 식량구매력을 유지시켰다.
9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자 하버드대학교 경제학 및 철학교수인 아마르티아 센은 기근과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진술하였다. "기근은 여러 나라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을 죽이지만, 지배자가 죽는 경우는 없습니다. 만일 선거도 없고, 야당도 없고, 검열받지 않는 공개적 비판도 없다면, 권력을 가진자들은 기근을 막지 못한 실패에 대해 정치적 책임을 질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기근의 책임을 지도층과 정치 지도자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2011년판 서문에서 장 지글러는 "이 지구상에서 10세 미만의 어린이가 5초마다 1명씩 기아로 사망한다. 이 같은 통계자료를 제공하는 FAO(유엔식량농업기구)에 따르면 지금 시점에서 세계의 농업생산량은 '정상적이라면' 120억명을 먹여 살릴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2011년 현재 지구상에는 약67억명 가량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기아로 인안 죽음에는 어떠한 필연성도 없다. 기아로 죽는 어린아이는 살해당하고 있는 것이다.....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유럽 국가들은 민주국가들이다. 민주주의에 무력함이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자유와 기본권을 누리고 있다. 우리 모두가 힘을 합한다면, 그래서 조직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면....조르주 베르나노스는 '신에게는 우리들의 손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썼다. 우리가 세상을 바꾸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마무리 하였다.
이 순간에도 굶주려 살해당하는 '나들'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지, 할 수 있는지 찾는 여정을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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