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가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한두 번 이상 경험하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돈 많은 사람과 친한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을 찾을 가능성이 높을까? 아무래도 친한 사람을 먼저 찾게 된다. 아는 사람 중에 돈 많은 사람이 있더라도 친하지 않으면 만나줄 가능성은 낮기 때문이다. 평일에 기업에서 직장인들이 열심히 활동하여 무엇을 창출할까? 돈 즉 자본을 창출한다. 그렇다면 사회복지를 비롯한 유관조직에서 근무하는 사회복지사들은 무엇을 생산하는가? 라고 누군가가 질문했을 때 기업의 직장인이 '돈'이라고 하는 것처럼 바로 답변할 수 있는 명쾌한 ‘수사(修辭, 레토릭)’나 ‘언어(言語)’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우리가 하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짧고, 쉽게 설명할 수 있을 때 '영향력'이 올라간다. 하지만 설명이 길고, 복잡할수록 파급력은 낮아지게 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서 영향력이 높은 사람과 조직일수록 구구절절히 설명하지 않는다.
사회복지기관과 사회복지사들은 사업과 성과를 짧고, 임팩트 있게 표현할 언어를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서 누군가가 사회복지사에게 당신이 하는 일은 무엇을 창출하나요? 라는 질문에 사용할 언어를 제시하고자 한다. 바로 '사회적 자본'이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 김승섭>에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다는 확신,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함께 해 줄 것이라는 확신'을 언급하였다. 안전한 사회를 갈구하는 사회구성원들의 소망을 표현한 설명이나, 이것을 사회적 자본의 설명으로 삼아도 손색없겠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잘 나갈 때가 있다. 그 때 내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찾게 된다. 하지만 잘 나가기만 하겠는가? 모든 사람은 인생에 한두 번쯤은 어려움과 위기를 겪게 된다. 그 때에도 내 곁에 사람들이 있다면 돈과 비교할 수 없는 가치가 아니겠는가? 이것이 사회적 자본이다.
그런데 사회적 자본은 현실적으로 자본에 비해 중요성과 영향력이 낮아서 사회복지는 경제영역에 비해 정치적 정책결정에서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경우가 많다. 이 지점에서 주목할만한 실험을 소개하고자 한다. '아이리스 보넷'과 '브루노 프레이'라는 경제학자는 흥미로운 실험을 하였다. 이들은 실험을 위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모집하여 두 그룹으로 나눴다. 두 그룹은 전혀 모르고, 보이지도 않았다. 이들은 A그룹에게 10달러씩을 나눠주고, 옆에 있는 B그룹에게 주고 싶은 만큼 주라고 하였다. 하나도 안 주고, 모두 가져도 좋다고 했다. 결과는 하나도 안 준 학생은 28%였으며, 평균적으로 2.5달러를 주었다. 두 번째 실험에서는 칸막이를 열고, 두 그룹이 서로의 모습을 한 번만 보게 하였다. 말은 나누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A그룹에게 10달러씩 주고, B그룹에게 주고 싶은 만큼 주라고 했다. 하나도 안 준 사람은 11%, 평균 3.5달러를 주었다. 마지막 세 번째 실험에서는 두 그룹 간에 간단한 대화를 나누게 하였다. 그리고 또 다시 A그룹에게 10달러씩 주고, B그룹에게 주고 싶은 만큼 주라고 하였다. 하나도 안 준 사람은 몇 명이었을까? 0명이었다. 간단한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모두 나눠주었고, 평균 5달러 즉 절반을 나눠주었다. 이 실험을 봤을 때 기업에서 창출하는 ‘자본’이나 사회복지를 통해 생산하는 ‘사회적 자본’이나 모두 ‘효용’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기업의 생산’만큼 ‘사회적 자본’도 동일한 ‘이익(利益)’을 가져온다.
사회복지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할 때 내용에 집중을 유도하기 위해 자주하는 질문이 있다. ‘돈 많은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죠? 그러면 집중하지 않은 참여자들은 종종 ‘네~’라고 답변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다시 한 번 묻는다. ‘돈 많은 사람’이 ‘훌륭한 사람’인가요? 그러면 교육장의 분위기는 환기되고, 겸연쩍은 웃음이 모락모락 일어난다. 그렇다. 대한민국은 지금까지 대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돈 많은’을 ‘훌륭한’으로 받아들여 온 경향이 있다. 이것은 사회복지분야에도 자유롭지 않았다. 이제 선진국 문턱에 들어선 대한민국은 ‘돈 많은’과 ‘훌륭한, 신뢰받는, 지속가능한’이라는 언어를 구분해야할 때가 왔다.
90년대 초 인류 역사의 이데올로기 전쟁에서 최종 승리는 ‘자유주의’가 승리했음을 주장하는 <역사의 종말>이라는 책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이 후 자본주의 주류 학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보수적인' 정치학자 중에 한 명이 되었다. 그런데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90년대 후반 <트러스트>라는 책을 통해 기존의 자신의 주장인 ‘자유주의’가 승리한 것은 맞긴 하지만 국가가 지속적인 번영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유주의’의가 추구하는 경제력만 가지고는 불가능하며, 공동체 구성원간의 ‘신뢰’가 반드시 있어야 함을 보수적인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제시하였다. 특히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신뢰 자본’의 차이다. 신뢰 기반이 없는 나라는 사회적 비용 증가로 선진국 문턱에서 좌절하고 말 것이다.”라고 언급한 내용은 식민지 경험을 한 나라 중 유일하게 선진국 문턱에 진입한 대한민국에게 인상 깊은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훌륭한’이라는 언어를 재개념화 해야 한다. 사회복지관을 둘러싼 지역사회가 훌륭한 지역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자본이 있어야 한다. 돈 없이 훌륭함을 추구할 수 있지만 상상의 영역이며, 현실적 설득력은 약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돈만으로 훌륭할 수는 없다. 돈은 많으나 살고 싶지 않은 나라의 사례가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면 훌륭한 지역사회는 자본과 사회적 자본이 ‘균형 잡힌’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주민조직과 지역사회복지사업을 하는 사회복지사는 자신을 ‘나는 우리 마을을 (살기 좋은, 신뢰받는, 지속가능한) 훌륭한 지역으로 만들기 위한 사회적 자본의 촉진자’라고 설명할 수 있다. 나아가 사회적 자본을 창출하기 위해 주민조직 사업과 지역사회복지 사업이 필요하다고 피력하자. 힘과 제도를 넘어 협상력 있는 대화로 한정된 자원을 배분해 낼수록 성숙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선진복지국가의 문턱에 올라선 대한민국의 사회복지사는 자신의 성실함, 열심, 최선을 다함, 진정성을 담아낼 설득력 있는 ‘민주적 언어’를 모아야 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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