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나와 아내는 세 아이의 육아와 활동으로 지친 일상을 보냈다. 아내는 공동육아 어린이집 원장을 하느라 일터와 집 모두 육아로 채워지는 멀미나는 세월을 살아내고 있었다. 일상은 나름의 루틴이 있어서 그럭저럭 보냈지만 문제는 휴일이었다. 다음주를 살아갈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해서는 휴일마저 온통 육아로 채워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와 아내는 서로의 충전을 위한 팀워크가 필요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는 그 팀워크마저 힘들었는지 무조건 한 나절은 제발 혼자 있고 싶다고 하며, 눈물을 흘렸다. 아내는 슬퍼도 울고, 화나도 운다. 그날의 눈물은 분명 분노의 눈물이었다.
아내를 무서워하는 나는 군말없이 세 녀석을 데리고 나갔다. 여섯, 다섯, 두 살 아동들을 몰아서 동네 놀이터에 갔다. 다른 엄마들도 분노했는지 아이들과 놀아주는 아빠들이 많았다. 왠지 안도감이 들었다. 놀이터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한 시경쯤이었으니 앞으로 다섯 시간을 버텨야 했다. 미끄럼틀, 그네, 정글짐, 모래놀이 등 시설을 모두 돌았다. 육체와 정신 에너지가 바닥이 났다. 한 참 지났겠지 했으나 시계를 보니 두 시였다. 당시 찍은 사진, 동영상을 보면 아이들은 귀엽고, 예쁘다. 하지만 그 때는 그냥 힘들었고, 아득했다. 고갈된 나는 더 이상 아이들에게 투여할 에너지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조직화’를 꺼냈다. 여섯살 첫째 아이에게 무슨 일있으면 얘기하고, 동생들이 놀이터 밖으로 나가지 말게 하고, 막내에게 냄새나면 기저귀 갈아야 하니 바로 얘기하라고 했다. 다섯살 둘째에게는 막내가 타는 그네를 밀어주라는 미션을 부여했다. 나는 부장, 첫째는 팀장 둘째, 셋째는 팀원을 만들었다. 그러고 나니 지친 몸 침대에 던지듯 맘이 편해졌다. 가져온 책을 꺼내어 읽었다. 그 순간이 달콤했다.
두 페이지를 사탕빨듯 음미하던 중 아이들이 내 앞에 어른거렸다. 고개를 들고 아이들을 보았다. “심심해. 다른 데 가요...” 다른데 가자는 요구를 실행에 옮기면 ‘놀아주기’에서 ‘프로젝트’가 된다. 집에 가서, 간식, 기저귀, 물 등을 준비해야 하고, 두 살 막내의 이동성을 고려한 장소물색이 들어가야 한다. 막막했다. 눈을 감았다. 잔머리를 굴려가며 질낮은 쉼의 몇 조각을 주을 것인가? 아이들과 적극적으로 놀아주어 질높은 추억을 만들것인가? 답은 뻔했다. 책을 손가방에 넣었다. 노란 은행잎이 흐드러진 맑은 가을 햇살에 비친 아이들의 눈빛을 보았다. “그래, 아빠랑 재밌게 놀아보자. 뭐 하고 싶어?”라고 물었다. 아이들은 ‘구슬줍기’를 외쳤다. 답이 빠른 걸 보니, 다른 데 가자는 게 아니라 자기들과 놀아달라는 의미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세 명의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쌀쌀한 가을바람도 잊은듯 동네 오빠와 형들이 쏘면서 놀았을 BB탄을 구슬이라며 열심히 줍고 놀았다. 그 구슬(?)들의 대부분은 흰색이었다. 그러다 어쩌다 빨강색의 구슬이라도 발견하면 다이아몬드를 발견한 듯 길길이 뛰었다. 두더지처럼 땅과 보도블럭 사이를 쑤셔대는 아이들 뒤에 슬그머니 다가가 '요기도 있다' 말해 주었다. 그 때 아이들은 반색하며 진귀하고, 투명한 육각형 왕구슬을 보여주었다.(그건 어느 여자아이 목걸이가 해체되어 떨어져 나간 플라스틱 구슬이었다) 녀석들의 표정을 따라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주었다. 나는 이어폰 꼿고, 따뜻한 커피를 들고, 조용히 책을 탐독하는 그 편안함(at-home)을 해체하여 아이들과 관계하였다. 나는 비로소 아이들에게 ‘환대’를 하였고, 아이들은 자신들의 세계로 ‘우정어린’ 초대를 하였다. 그 날 구슬줍기는 사이다 패트병 반통을 채우는 혁혁한 성과를 거뒀다. 성과물에 아이들과 뿌듯해하고 있다보니 저녁 노을이 아름답게 우리를 반겨주었다. 여섯시 반이나 되었다. 40대의 어느 하루의 나를 해체하지 않고 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집에 들어가니 아내는 회복을 했는지 맛있는 저녁을 마련했다. 그 날 아이들과 먹었던 저녁밥은 유독 달았다.
환대는 편안함의 해체이고,
해체는 타인에 대한 환대이다.
Hospitality is the deconstruction of the at-home,
Deconstruction is hospitality to the other.
- 데리다 -
데리다는 난해한 철학자다. 그의 글은 어렵다. 의미있는듯 하나 안개같던 위의 데리다의 글 조각은 몇 년간 나의 메모장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날 아이들과 ‘구슬줍기’로 데리다의 이 문장이 구멍에 맞는 열쇠를 발견하듯 이해가 되었다. 타인에 대한 진정한 환대는 내 자신의 편안함과 익숙함의 해체이고, 내 자신의 편안함과 익숙함의 해체는 타인에 대한 참다운 환대다. 나의 편안함과 익숙함을 해체함 없이 열심히, 최선을 다해 타인에 대한 환대 행위를 할 수 있다. 데리다는 그것은 환대가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의 해체없는 환대 행위는 오히려 타인에게 자신의 열심과 최선을 다한 만큼의 모욕감과 수치심을 줄 수도 있다.
2,600년전 그리스의 노예였던 이솝은 데리다의 철학을 ‘여우와 두루미’라고 알려진 우화(寓話)로 이야기하였다. 여우는 두루미를 좋아하여 자신의 집에 초대하였고, 최선을 다해 두루미가 좋아하는 음식을 대접하였다. 다만 두루미가 좋아하는 음식을 여우가 편하고, 친숙한 방식으로 ‘넓은 접시’에 내놓았다. 두루미 입장에서는 여우의 열심만큼 모멸감의 정도는 컸을 것이다. 며칠 후 두루미는 여우를 초대하였고, 여우가 좋아하는 음식을 좁은 호리병에 넣어 제공하였다. 여우는 그제서야 깨달았을까?
주민조직화 사업을 하는 사회복지사는 사업을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그물망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해관계자들은 서비스 이용자뿐만 아니라 지역주민, 자원봉사자, 공무원, 전문가, 팀동료 등이다. 주민조직을 하는 사회복지사는 이해관계자들을 연결하고, 조직하여 지역의 의제와 문제를 도출하고, 공동의 목적과 목표를 합의하는 민주적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주민조직이라는 여정의 시작에서 우정과 환대를 위한 이해관계자간 ‘사회적 자본’의 충전은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사회복지사는 이용자, 주민, 자원봉사자, 공무원, 전문가가 각자 익숙하고, 낯선 소통방식, 조직문화, 조직의 작동원리, 성과지점을 이야기하고 생각할 수 있는 ‘마당’을 조성해야 한다.
주민조직화에 들어가면 이용자, 주민, 자원봉사자들은 생각하는 것을 어렵다고 호소한다. 하지만 ‘낯설다’라는 메시지를 ‘어렵다’는 표현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까지 ‘사유(思惟)’는 권한자와 리더만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주민조직화 사업에서 사회복지사는 지역의제와 연관된 이해관계자에게 ‘생각의 품’을 민주적으로 배분해주는 자다. 조직화가 될수록 중력(重力)이 작동하듯 사고(思考)의 품이 특정한 이해관계자에게 쏠리게 된다. 이러한 현상을 지속적으로 포착하여 의미와 재미를 버무려 ‘민주화’시켜야 한다.
주민조직화는 밥상을 차리고, 초대하는 방식이 아니라 밥상에 둘러앉아 ‘무슨 요리를 할까요?, 그것을 먹고 싶은 이유가 무엇인가요?, 어떻게 요리할까요? 이 요리를 위해 누가 어떤 역할을 할까요?’와 같은 질문을 주고 받는 과정이다. 상호질문의 과정에서 자신과 타인의 '익숙함'과 '낯섬'을 확인하고, 자신의 '해체' 수준과 정도를 파악함으로 주민조직화는 시작된다. 이러한 시작은 번거롭다. 하지만 훨씬 효과적이다. 이해관계자들을 음식 평을 하는 ‘손님’이 아니라 만든 음식에 책임을 지는 ‘주인’으로 전환시키기 때문이다. 우정과 환대는 친숙한 자신을 해체하는 위대한 행위다. 주민조직화는 우정과 환대를 사업에 천천히, 꾸준히 녹여내는 노정(路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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