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7년차 강사다. 나는 민주주의와 시민성을 주제로 강의를 하여 일상을 살아가는 시민들에게 동기부여를 하는 일을 전업으로 한지 9년정도 되었다. 19년도까지 나는 나를 쉴새없이 가속하여,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그러다가 코로나19라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가속을 할래야 할 수 없는 심각한 외부위협을 맞게 된 것이다. 강사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직접 만나는 모든 직종은 지금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9년전까지 나에게 있어 현장강의는 시민단체활동가로서 가치확산의 수단이었다. 강의가 수단이었던 시절에 코로나19를 겪었다면 심각성은 현재보다 덜 했을 것이다. 하지만 강의가 나의 전업(專業)이 된 지금 코로나19의 무게는 천근만근이다. 전업은 하는 일이 수단뿐만 아니라 목적도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목적과 수단이 합쳐진 전업은 외부위협에 취약하다. 가속도가 높기 때문에 위협이 다가왔을때 브레이크를 밟기가 어렵다. 돌출된 위협에 급브레이크를 밟게 되면 전복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2020년 1월에 광저우에 주재원으로 있는 친구집으로 휴식을 하러 갔었다. 일정중 현지 뉴스에서 치료가 되지 않는 바이러스가 나왔다는 보도를 접하며, 2016년 메르스가 떠올랐다. 당시 메르스로 사망자가 나오자 예약된 강의들이 취소가 빗발쳤다. 당혹스러웠지만 한달만에 메르스는 가라앉았고, 취소된 강의는 다시 일정이 잡혔을 뿐이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되겠지라며, 나는 친구와 맥주캔을 열며, 광저우의 따뜻한 바람을 즐겼다. 하지만 귀국하고서 상황은 심각했다. 광저우의 친구는 집에도 못들어가고, 기숙사에 격리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상반기에 잡혀진 굵직한 스케줄들의 취소전화를 받는 것이 업무가 되었다. 취소가 아니라 코로나19가 잠잠해질때까지 당분간 연기라는 조건을 단 '취소'였지만 기약이 없었다. 강사도 역할이 다르다. 특히 나는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강사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강사다. 현장에서 청중의 마음을 흔들어야 좋은 평가를 받는 강사다. 비언어적 소통을 구사하기 어려운 온라인, 동영상 강의는 가급적 지양하는 것을 '가치'로 삼아왔다. 그래서 2020년 코로나19는 나에게 더욱 어려웠다.
스마트폰에 저장된 2020년 상반기 스케줄을 가끔 본다. 스케줄러의 텅빈 공간들과 당시 가족들의 안타까워하는 눈빛이 겹쳐진다. 19년까지 빠르게 지나가던 계절의 속도가 더뎠다. 봄만 그럴줄 알았으나 여름, 가을, 겨울이 모두 느렸다. 아이들의 등교와 학사가 미뤄졌고, 온라인 수업방식의 도입으로 엄마들과 선생님들은 솟구치는 짜증을 움켜잡아야 했고, 강사도 방역으로 마스크를 써야한다느니, 강사는 마스크를 벗어야 소리가 잘 들린다느니 하는 엇갈린 요구들에 피곤했다. 이처럼 낯선시간들이 쓰나미처럼 일상에 치고들어오며, 몇 년간 만들어온 루틴을 세심하게 넘어뜨렸다. 하루하루가 선명했다. 선명한만큼 고달팠다. 낯섬은 안 보이던 일상을 객관화하였다. 거리가 없어 질척이던 관계들이 코로나19가 인위적으로 관계들의 거리를 벌려놓으니 사람들은 더 모이려고하고, 어떻게든 하고자 하는 교육마다 특별한 홍보를 하지 않아도 신청자들이 조기마감된다는 얘기들이 들려왔다. 나는 공동체적 가치를 확산하는 활동가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활동가의 삶은 공동체적 가치보다는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는 가치에 밀려 대부분 좌절로 채워졌다. 경력이 붙어 마흔이 넘어 최근 개인적으로 조금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는 있지만 아직 대중의 인식은 미미하다. 그러나 코로나19는 사람들에게 관계의 소중함을 깨닫게 했다. 또한 코로나19는 직전까지 인류위기의 주인공이었던 '미세먼지'를 주춤하게 만들었고, 자본주의 최첨단 국가들이 재난지원금이라는 명목으로 모든 국민들에게 한정된 자원을 직접 지급하는 집단적 공산주의 실험을 하게했다. 여기엔 보수와 진보가 한 마음이었다. 평상시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코로나19가 만든 기적으로 불려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한 두달, 길어봤자 세 달이라는 예상을 깨고, 현재 삼년차가 되었다. 마스크는 익숙함을 넘어 일상이 되었다. 2년간 만난 사람들중에 눈밑으로는 한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 수지가 안 맞아 대부분 소량생산, 중국산 수입이었던 마스크는 매일같이 홈쇼핑에 상품으로 등장하고, 패션으로 취급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세 번의 백신접종으로 국민의 의무를 다하려 노력했고, 매번 맞을때마다 삼일이상 온몸을 비트는 고통을 겪어내야 했다. 전업강사로서 전복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정신과를 정기적으로 다니며 약을 처방받으며 버텼고, 어느덧 온라인, 비대면 수업으로도 동기부여를 하는 노하우를 축적하게 되었으며, 동영상 콘텐츠 제작이라는 상상하지 못한 영역까지 들어가 이리저리 돌파구를 찾고있는 중이다. '독서, 참여경험, 사색, 메모, 대화, 파워포인트' 정도가 전업을 유지하던 재료였으나 지금은 거기에 영상녹화, 편집프로그램, 웹캠, 마이크, 자막프로그램 등이 추가되었다. 코로나19로 낯선 것들이 삶에 추가될 때마다 시간은 느려졌다. 위대한 경구인 'This, too, shall pass away, 이 또한 다 지나가리라'를 속으로 예전보다 자주 되뇌게 되었다.
자가격리 5일째를 맞고 있다. 지난 2년간 코로나19의 상황에서도 횟수는 낮아졌지만 그래도 전국을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하길 멈추지 않았음에도 나에게 코로나19는 오지 못했다. 그런데 며칠전 둘째아이가 학교에서 코로나19를 가져오더니 셋째로 전달되었고, 첫째까지 걸리고, 매일 둘째와 셋째를 품에 끼고 사는 나에게도 당연하다는듯이 왔다. 오미크론은 가볍다는 조언들로 맘편히 임했다. 자가격리를 통보받으면 직장인들은 회사에 안 나가면되지만, 전업강사인 나는 일감을 잃는 고가의 격리를 하는 셈이다. 자가격리 3-4일차인 지금 오미크론에 호된 시달림을 겪고 있다. 선인장과 고슴도치를 삼킨 듯한 목통증과 드라이버로 쑤시는 듯한 기상시 두통과 불쾌감에 시달리고 있다. 냄새가 사라졌으며, 식구들은 한 집에 있지만 각자의 방에 갇혀, 화상으로 안부를 묻고, 아내는 모든 식구들의 밥을 배달하는 사람이 되었다. (곧 아내도 양성을 받을 조짐이 보인다. 그 때는 각자 알아서 해야한다. 아니 모두 걸렸으니 다같이 이전처럼 일상이 회복되려나?) 매일매일이 낯설다. 식구들과 매일 식탁에 앉아 마주보고, 밥을 먹고, 웃고, 떠들고, 삐지는 시간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인식하게 된다.
내 삶의 중력(重力)이 강해질 때 시간은 느리다. 물질세계의 상대성 원리는 의식세계에도 적용된다. 전염병, 전쟁, 남북관계, 선거, 기름값, 기후변화 등 우리 삶의 중력들이 많이 무거워졌다. 어쩌면 삶의 중력이 강해질 때라야 비로소 자신과 주변의 환경을 직시하고, 명료하게 인식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엔트로피 법칙도 중력처럼 내면 세계에도 반영된다. 중력이 약하면 '나는 세상의 중심이고, 모든 걸 다할 수 있다'는 비합리적 무질서 상태가 된다. 의식의 무질서는 내 삶은 물론 이웃에게도 많은 피해를 끼친다. 스벤 브링크만은 그의 책 <스텐드펌> 에서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무능하다. 우리가 허약하고 의존적이다는 사실에 대한 겸손, 그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연대의식 근원이며 민주주의 토양이다.'라고 했다. 지금처럼 찾아오는 삶의 중력은 나와 내 주변에 생명력있는 질서와 합리적 겸손이라는 선물을 준다. 인류는 코로나19를 통해 모두 연결되어 있고, 의존되어 있으며, 지구를 너무 혹사시켰고, 자연과 동물을 마구 착취했을 때 파멸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집단적으로 약간이나마 인식하는 계기를 주었는지도 모른다.
영화 그래비티(GRAVITY)에서 우주인들은 지구로부터 372마일 떨어진 곳에 도착했을때 처음엔 아름답고 경이로운 우주공간의 '무중력'에 황홀해했다. 하지만 완전한 무중력은 곧 죽음이며, 무의미다. 텅빈 무중력은 무한하고, 영원한 감옥일뿐이었다. 무중력을 통과하여 기적적으로 지구로 귀환한 라이언 스톤(산드라 블록 역) 박사가 뻘흙을 그러쥐고, 짓는 흐뭇한 미소는 마치 길을 잃은 아이가 엄마를 만나 품에 안기는 듯하다. 그녀가 한발한발 다시 찾은 중력을 품에 안으며 한 마지막 대사는 "(중력...) 땡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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