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지지 않은 환경을 거부하는 고통, 진보의 무게
진보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내가 선택하지 않았으나 나를 규정하고 있는 삶의 모든 환경을 거부하고 넘어서야 하는 투쟁이기 때문입니다. 부모, 형제, 친족과 같은 혈연부터 민족, 국가, 사회, 문화라는 거대 구조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맥락 속에서 형성됩니다. 특히 어린 시절의 부모는 아이에게 있어 거역할 수 없는 '신'과 같은 절대적 존재입니다. 우리가 언어로 '신'을 호명할 때, 그 신에 투영하는 상상과 의미는 (그것이 숭배든, 원망이든, 그리움이든) 결국 내 부모라는 거울을 통해 굴절된 환상일 가능성이 큽니다.
축복과 저주가 혼재된 양육, 대물림되는 비극
누군가에게 부모의 양육은 축복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안타깝게도 저주가 됩니다. 사실 대다수의 사람에게는 이 축복과 저주가 복잡하게 뒤섞여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독립할 때까지 이 혼재된 감정의 퇴적물로 자아를 구성해 나갑니다. 비극은 우리가 이 구성된 자아를 채 되돌아보기도 전에, 즉 나만의 '선택'으로 스스로를 다시 빚어내기도 전에 누군가의 부모가 된다는 점에 있습니다. 나조차 온전히 나를 구성하지 못한 채, 또 다른 생명의 세계를 구성해야 하는 현실에 놓이는 것입니다. 이 순환의 고리 때문에 인간의 진보는 이토록 어렵고 더딥니다.
변명하는 존재에서 책임지는 존재로의 진화
그럼에도 인간은 진보해 왔습니다. 동물의 왕국과 구별되는 인간 사회를 일궈낼 수 있었던 것은, 한 걸음씩 우리의 선택으로 직접 구성한 산물들을 확보해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 기꺼이 책임을 지기 시작하면서 '변명하는 존재'에서 '책임지는 존재'로 변화해 갔습니다. 일상에서의 진보 또한 이와 같습니다. 그것은 부모와 선배로부터 받지 못한 좋은 것들을 나의 자녀와 후배에게 건네고, 반대로 그들로부터 받았던 상처와 악습을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선택'입니다.

용기라는 축적이 만들어내는 일상의 거듭남
진정한 용기는 '전달의 필터'가 되는 데서 나옵니다. 부모에게 받아본 적 없는 사과와 감사, 눈을 맞추는 사랑의 고백, 그리고 자신의 실패담을 공유하는 것. 특히 자녀의 고민을 진지하게 경청하는 일은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는 진보적 행위입니다. 동시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무시, 자랑, 폭언, 일방적인 훈계를 내 대에서 끊어내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내가 그 행위를 저질렀을 때 스스로 역겨움을 느낄 수 있는 도덕적 상상력과, 타자를 나와 대등한 인격체로 바라보는 성찰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진보는 이뤄집니다. 나보다 약한 이에게 사과하는 행위는 예수가 말한 '거듭남(Re-born)'의 세속적 실천과도 같습니다.
사과라는 해방, 연대로 치유되는 고독
진보를 열망한다면, 나보다 신체적·사회적·경제적 약자에게 '사과하기'부터 시작해 봅시다. 이 첫걸음은 마치 지구의 중력권을 벗어나는 로켓처럼 막대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만, 한 번 궤도에 오르면 그다음부터는 훨씬 수월해집니다. 약자에게 사과하는 삶의 가장 큰 유용성은 "나는 항상 옳아야 한다"라는 무거운 강박에서 홀가분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해방'이라 부릅니다. 이 해방감은 타자와의 진정한 연대를 불러오고, 그 연대는 우리가 오랫동안 앓아온 외로움이라는 고통을 비로소 치유하기 시작합니다. 진보는 결국, 약자에게 기꺼이 사과할 줄 아는 용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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