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강화의 한 음식점 화장실에서 인생 통증을 겪고, 더러운 바닥을 기어나왔었다. 허리디스크가 발생한 것이다. 직업병인지, 유전인지 올게 왔다. 꽤 받아둔 스케줄로 노심초사하면서 노인처럼 엉금엉금하면서 한의원을 다닌지 이주일만에 허리통증은 가라앉았다. 그런데 허리디스크가 무서운 건 허리통증을 가라앉은 이후부터였다. 다리 뒤근육이 찢어질듯 당기기 시작하는데 허리통증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중력이 잡아당기는 느낌의 찌르르르 쏟아지는 전기적 자극은 하루하루 죽고싶은 심정이었다. 아내가 내 신경질을 받아주며, 출강을 할 때마다 테이핑을 해주었다.
지역에 조사건을 맡은 것이 있어서 다른 위원들과 동네를 조사하러 돌아다니면서 위원들중 가장 젊고, 건강했던 나는 이백미터 걸을 때 마다 앉을수 있는 곳마다 앉았다. 보다 못한 한 동료위원은 왜 이리 힘들어하냐고 넌지시 물었다. 허리디스크라고 얘기하고, 증상을 말해주었더니, 무릎을 치면서 마치 자기 통증처럼 고통스러워했다. 그 분은 한 쪽 다리에 소아마비 장애를 가지신 분이었는데 역시 허리디스크로 오랜 세월 고통을 겪으셨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완치의 방법이자 사실상 수술없이 낫는 유일한 방법이라며 '수영'을 제시해주셨다. 나는 나보다 더 고통스러운 상황에 있으셔서 그 분의 제안을 교시처럼 받들었다. 나는 그 날로 당장 초등학교이후 이십미터도 가보지 않았던 수영을 시작했다. 살기위해 차도가 있던 없던 했다. 두 달째에 접어들자 수영이후 상쾌함에 집에 돌아가는 바람을 느끼고 있었는데 앗! 맞다. 통증?? 통증이 없는게 아닌가! 갑자기 통증이 사라졌다.
그 후로 나는 두 번의 재발을 겪으며 수영을 반복해 돌입하고 있다. 재발이 되어도 당황하지 않고, 한 달을 참고 수영을 하면 다시 회복하고 있다. 지루한 과정이다. 자유형으로 왔다갔다, 물속걷기로 왔다갔다. 이제는 꽤 많은 거리를 가고, 수영하면서 사람들을 관찰하기도 한다. 일년 정도되니 멋지게 수영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이가 지긋하신 노인분들도 오랜 수영경력으로 자유영, 배영, 접영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런데 나는 한 번도 배영과 접영을 부러워하거나 해보고 싶지 않았다. 남들보다 더 잘하고자 하는 성격으로 따라잡고자 시도해볼만도 한데 별 관심을 느끼지 않는다. 가끔 수영하는 사람들에게 배우라고 권유도 받는다.
왜 관심이 없을까? 그렇다. 나는 그 분들과 '수영의 목적'이 달랐던 것이다. 나는 오직 허리치료를 위해 수영을 하는 것이고, 다른 분들은 건강, 친목, 취미, 자기개발을 '위해' 하는 것이다. 나는 치료가 목적이라서 노인분들이 주로 이용하는 라인에서 이러저리 걷고, 움직이고, 걸어다녀도 하나도 이상하거나 불편하지 않다. 수영으로 오직 허리가 좋아지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 '목적' 얘기를 하고 싶었다. 우리의 모든 행동에는 목적이 있다. 하지만 그 목적을 분명히 하고, 심지어 주변에 천명도 하지만 많은 경우 목적을 의식하지 않기도 하고, 자기도 잘 모른다. 아니면 다른 것으로 (자신부터) 속이기도 한다.
예를들면 명예가 목적이라고 알고 있었으나 사실은 이익 또는 생존이거나, 권력이 목적이라고 하나 사실은 명예나 이익이 목적인 경우이다. (이런 분들은 정치를 사회운동처럼 또는 간디처럼 하다가 봉변을 당하기도 한다)
목적은 목표와 연결된다. 한 사람의 목표 즉 구체적 행동과 행보를 보면 그 사람의 목적을 역추적 할 수 있다. 명예가 목적이라고 하지만 하는 행보들은 이익적 행동에 기민하다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그 사람의 목적은 '이익추구'다. 목적이 다르면 귀결은 갈등이다.
가족여행만해도 한국사람들의 공통 경험은 갈등이다. 한번쯤 가족여행에서 돌아오는 교통편안에서 '다시는 가족여행 같이 가나봐라!'라는 다짐을 했을 것이다. 왜냐 가족여행을 준비하면서 장소, 돈, 날짜, 스케줄만 결정했지 왜 가는가에 대해서는 대부분 생각하지 않고 떠나기 때문이다. 효도여행인지, 힐링인지, 관광인지, 체험인지,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위함인지,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위함인지, 자녀를 위함인지, 자신을 위함인지, 아내를 위함인지, 남편을 위함인지, 초등생 자녀를 위함인지, 청소년 자녀를 위함인지..... 이유에 따라 그 여행은 목표의 차원을 달리한다. 여행을 할 때 각자의 목적은 모두 다르게 된다. 그렇기에 여행지에서 '결정하는 모든 것'들의 이유가 다를 것이고, 누군가의 것으로 결정되면 다른 이유를 가진 자들은 불만을 쌓고, 그것이 돌아오는 교통편안에서 폭발하는 순간. 모두들 다시는 가족여행을 가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을 불어오게 된다.
갈등을 겪고 있다면 당사자들의 애초 행동 '목적'을 나눠보자, 복잡한 관계, 논리를 일단 옆으로 치우고 "도대체 나는 왜 이걸 하는가?"라는 질문앞에 서보자. 의외로 단순한 해결의 실마리가 드러날 것이다.
'칼럼 [콩나물시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듣기'는 훈련이 필요한 역량 (0) | 2020.07.06 |
---|---|
인생이라는 항해에 대한 고찰 (0) | 2020.06.21 |
나를 아는 것과 그런 나를 받아들이는 것 (0) | 2020.06.09 |
몸과 조직의 체계_'새로움'은 '버림'에서 시작된다 (0) | 2020.06.08 |
포기와 수용의 차이 (0) | 2020.06.07 |